북·미 회담 뒷담화…시간 없는 트럼프 수세 몰려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8.06.21 17:44
  • 호수 1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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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 트럼프, ‘자화자찬’으로 돌변한 까닭은?

 

역사적인 만남으로 평가되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서구 언론의 반응은 ‘역시 트럼프는 자아가 강한 사람(Super Ego)’이라는 것이다. 남들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 회담의 성공자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어서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싱가포르 회담 직후 발행한 잡지의 표지 제목을 ‘Kim Jong Won’이라고 달았다. ‘김정은(Kim Jong Un) 북한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승리했다(Won)’는 것을 위트 있게 표현한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낯선 환경에서 김정은이 트럼프보다 더 잘했다”고 평가했다.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면 북한과 합의안을 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포괄적인 합의안’을 내자 6월12일 회담 결과를 지켜보던 싱가포르 인터내셔널미디어센터(IMC) 내 미디어 관계자들은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회담 직후인 6월14일 폼페이오 장관이 서울에서 외신기자들과 설전을 벌인 것도 이 때문이다. ‘참패’라고 비난하는 미국 언론을 상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가짜뉴스, 특히 NBC와 CNN을 시청하는 건 참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북한과의 합의를 폄하하기 위해 열심히도 애쓴다”고 비난했다. 

 

회담 결과를 놓고 미국 내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심각한 수준이다. 미국을 방문한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6월19일 전화통화에서 “회담 결과에 대한 워싱턴 정가나 학계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지 않다”면서 “북한이 뭔가 구체적인 후속조치를 내지 않을 경우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6월12일 싱가포르 카펠라호텔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미국 언론은 ‘트럼프 패배’라고 평가한다. ⓒ싱가포르 정부 제공


 

현재까지 미국 언론 반응을 종합하면, 북·미 정상회담 전날 폼페이오 국무장관까지 나서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압박하던 모습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느냐는 것이다. ‘북한에서 두 번째로 영향력이 크다(second most powerful man in North Korea)’던 김영철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일 때도 주도권은 미국에 있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워싱턴 정가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트럼프, 김정은 구두 약속 진짜 믿나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대치를 밑도는 협상 결과를 보면서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우선, 북한이 합의문 수준은 아니지만 뭔가 트럼프 마음에 들 만한 약속을 구두로 했을 수 있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구체적인 비핵화 방법이 명시됐을 경우 외세에 의해 핵개발을 중단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CVID 관련 문구를 합의문에 넣는 것을 북한이 끝까지 반대했을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 관영매체인 ‘노동신문’도 회담 하루 전날 칼럼에서 “자주성에 기초한 공정한 국제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비핵화라는 목적보다는 자주성을 해치는 절차적 문제를 북한이 더 중요하게 여겼을 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 

 

대신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이 구두로 협상 테이블에서 비핵화에 대해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을 끝내고 몇 시간 뒤 센토사 섬 카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이 비핵화 이행작업을) 도착하자마자 할 것이다. 잘할 거라고 말했으며 분명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좋은 팀을 갖고 있을뿐더러, 이번엔 뭔가를 이루고자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 높은 기대감을 표시했다.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밝힌 것도 인상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비핵화가 20%가량 진행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들었다”고 말해 그 정도 선에서 가이드라인을 세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미국 측 협상 총책임자인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6월18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김정은)는 그의 나라를 완전하게 비핵화하겠다는 약속을 매우 분명하게 했다”고 밝힌 것은 김 위원장의 구두 약속을 뒷받침해 준다. 정상회담 직후인 6월14일엔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인 2020년 말까지 주요 조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는 발언도 했다. 구두로라도 선제적인 비핵화를 약속했다면 김 위원장의 최근 세 번째 중국 방문은 핵 포기로 인한 체제 불안을 중국이 보호해 달라는 일종의 ‘보험성 방중’ 성격이 짙다.  

 

또 하나의 가정은 애초부터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어떠한 결과물도 얻지 못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현지 외교가에서는 실무협상자인 성 김 주필리핀 미국대사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판문점에서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지만, 뚜렷한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트럼프의 압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북한이 회담에 응하기는 했지만, 비핵화 방법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큰 이견을 보였다는 것이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정상회담 전날에 백악관 기자들을 소집해 “CVID 방식의 비핵화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강조한 것도 실무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북한을 압박하기 위한 제스처였다고 봐야 한다. 

 

 

北·美 회담 1라운드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 현지 시찰에 나선 6월11일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양측 실무진이 모처에서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일부 국내 보수언론은 회담 당일 오전까지 양국 협상팀이 합의점을 찾지 못해 미완성된 합의서가 정상회담 테이블에 올라갔다고 보도했다. 이때 미국 협상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각론은 생략하고 큰 틀에서만 합의하는 ‘포괄적 합의서’다. 한 외교전문가는 “강경론자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훗날 정치적으로 논란을 만들 합의안보다는 추후 협상을 이어가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회담 직전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와 관련해 ‘물리적 상황(Physical Condi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서 이러한 변화가 읽힌다. 한 정부 고위관계자는 “검증과 사찰이 뒤따르지 않는 비핵화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데 미국이 검증 가능한 사찰 방식을 강하게 요구할 경우 북한은 주권국가임을 강조하며 판을 깨려 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식으로 싱가포르 회담이 마무리되면서 결과적으로 트럼프가 과거 북한이 사용하던 ‘벼랑 끝 전술’과 ‘살라미(잘게 쪼개 단계적으로 협상에 나서는 것) 전략’을 사용하게 됐다는 점이다. 싱가포르 현지에서 양측 모두가 구체적인 합의안을 내기까지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협상의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기대치만 충족시키지 못했을 뿐 딱히 잃은 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6월12일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다. 오히려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미군 유해를 송환해 오는 쾌거를 이뤄냈다”고 자화자찬한 것에서 이러한 생각이 읽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6월11일 싱가포르 이스타나궁에서 정상회담 전 악수하는 모습. 이번 북·미 정상회담으로 싱가포르는 약 6200억원의 홍보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싱가포르 정부 제공


 

이러한 협상 과정에서 우려되는 것은 ‘한·미 군사동맹 약화’다. 트럼프가 먼저 북한과의 협상카드로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감축·철수를 낸 것을 두고 우리 국내 보수층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비핵화에 따른 대북 지원과 관련해 우리 쪽의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고 있는 것도 비즈니스맨 출신다운 트럼프식 발상이다. 최근 G7(주요 7개국)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독일·프랑스·캐나다 등 전통적 우방과 갈등 양상을 보인 것이 한·미 양국 관계에서 재연되지 말한 법이 없다. 이러한 미국 쪽 의중은 6월2~3일 샹그릴라 회담에서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과 우리나라 송영무 국방장관이 한·미 연합훈련에 일정한 형태의 변화를 줄 수 있다고 합의한 것에서 변화가 감지됐다. 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는 현재 남·북·미 3국의 공통 목적에 부합된다”면서 “한번 흐트러진 한·미 군사동맹을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다 분명한 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 정상 간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초대 6자회담 수석대표 출신인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미·소 군축회담이 이견만 확인한 채 결렬됐지만 1년 후 중거리미사일조약(INF)이 탄생한 것도 이전 회담 결렬이 큰 보약이 됐다”면서 “양국 정상이 만나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대목”이라고 말했다. 

 

협상전문가인 박상기 BNE글로벌협상컨설팅 대표는 “이번 싱가포르 회담은 권투로 치면 1라운드에 불과하다”면서 “서로 탐색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북한의 회피 전략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첫판부터 많은 것을 가져갈 것처럼 미국 측이 호언장담했지만, 이번 라운드는 서로 가져간 게 없는 무승부라는 것이다. 북한도 이번 회담에서 당초 기대했던 경제제재 완화는 이뤄내지 못했다. 트럼프는 회담 후 미국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우리도 준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박 대표는 “전통적으로 동양은 ‘받은 뒤 주는(Take & Give) 전략’을, 서양은 ‘주고 난 뒤 받는(Give & Take) 전략’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번 회담에서 트럼프가 한·미 연합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감축을 먼저 제안한 것도 그런 의미”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벼랑 끝·살라미 전술로 대응

 

앞으로 상황은 어떻게 봐야 할까. 김 위원장의 6월19일 방중은 이런 면에서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번 세 번째 방중은 비핵화에 따른 체제안정을 보장받기 위한 측면뿐만 아니라, 비핵화 협상장에 중국을 더 가까이 끌어들여 북·미 간 협상을 미·중 간으로 바꾸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그런 점에서 미국 내 비판 여론과 싸우며 임기 내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는 트럼프가 지금 수세에 몰려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남은 시간이 트럼프 편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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