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여성 액션의 새로운 이정표 될까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29 10:46
  • 호수 149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 원톱 액션 《악녀》와 비교 한국 여성 액션영화에서 진일보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기억을 잃은 소녀는 자신의 과거를 모른다. 자윤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의문의 남자가 나타나 흘린 말에 따르면, 그건 소녀의 본명이 아닌 것 같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수상한 사람들은 소녀의 주위를 에워싸며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다. 소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떤 과거로부터 도망쳤으며, 그가 잊고 있는 기억은 무엇인가. 박훈정 감독의 《마녀》는 여고생 자윤(김다미)의 진짜 정체를 둘러싼 미스터리 액션이다. 여성 원톱 액션이라는 점에서 개봉 전부터 《악녀》(2017)에 비견되기도 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 영화는 초인의 탄생 서사에 조금 더 가까워 보인다. 다만 주인공이 그 힘을 개인적 복수나 대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 신선하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 등장했던 여성 주인공 액션영화들과 비교해 분명 진일보한 면이 있다. 다만 아쉬운 점 역시 뚜렷하게 존재한다.

 

박훈정 감독의 여성 원톱 액션영화 《마녀》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주인공

 

자윤이 어떤 조직의 실험을 통해 탄생한 존재임은 극 초반부터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자윤은 조직의 근거지를 피바다로 만든 뒤 도망친다. 이후 농가를 운영하는 부부가 엉망인 몰골로 쓰러져 있는 자윤을 발견해 양녀로 들인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자윤은 평범한 고등학생이 됐다. 문제는 자윤이 엄마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큰 상금이 걸린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시작된다. 자윤을 알아본 조직원들은 서서히 그의 주변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점점 심해지는 두통 역시 자윤을 끈질기게 괴롭힌다. 

 

《마녀》는 처음부터 연작 개봉을 염두에 뒀다. 본편에는 ‘Part1. The Subversion(전복, 파괴)’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또한 영화는 자윤 외 또 다른 ‘마녀’의 등장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닥터 백(조민수)이 정확히 어떤 목적을 위해 실험을 감행했는지, 그 배후에는 어떤 세력이 있는지 등의 자세한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번 편 서사의 동력은 주인공 자윤이 품은 단 두 가지의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쫓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의 답을 하나씩 찾아가려는 것처럼 보일 무렵, 영화는 반전을 통해 예상과 다른 흐름을 펼친다. 

 

박훈정 감독은 《마녀》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한 작품이라 말한 바 있다. 인간이 악하게 태어나 선하게 변하는 것인지, 선하게 태어나 악하게 변하는 것인지, 환경과 개인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궁금증을 녹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이 같은 주제의식을 심도 있게 펼쳐내기보다는 배경 설명 차원에 머문 듯한 인상이 강하다. 연작 기획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자윤의 입장을 그리는 중반부까지 긴장감의 밀도가 그리 탄탄하지 않다는 점은 아쉽다. 자윤을 추적하는 미스터 최(박희순)와 귀공자(최우식) 캐릭터를 위력적으로 느끼기엔 그들에게 할애된 에피소드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구축된 것 같지 않다. 자윤의 친구인 명희(고민시)가 담당하는 유머 역시 효과적으로만 기능했다고 보긴 어렵다. 캐릭터가 지닌 매력과는 별개로 유머의 타이밍은 종종 엇박자이거나 사족으로 느껴진다. 모든 의문을 자윤과 닥터 백이 대면한 이후 상당한 양의 대사로 설명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친절한 방식이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4)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대상화되지 않은 여성 캐릭터

 

대신 흥미로운 것은 자윤이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이 같은 캐릭터 설정을 반전으로 심어두었다. 자윤이 기억을 잃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조직이 자신을 찾아오도록 미끼를 던졌다는 설정이다. 일반적으로 자윤 같은 캐릭터는 조직의 희생양이 된다. 주인공은 자신을 괴물로 키워낸 조직에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가족 등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은 이 같은 행동의 도화선이다. 자윤은 다르다. 일방적인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단점을 보완해 초능력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싶어 한다. 

 

자윤에게서 성별의 특성이 크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다시 말해 이 캐릭터의 성별을 남자로 바꾸어도 영화의 결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특히 반전 이후의 자윤은 감정에 좌지우지되거나 성별에 따른 신체적 나약함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후반부 액션이 강렬한 이유는 자윤 그리고 맞서 싸우는 이들이 초인적 힘을 지닌 존재여서이기도 하지만, 행동의 발목을 잡는 여타 감정들이 제거돼 있기 때문이다. 소녀 캐릭터를 특정 이미지로 대상화하지 않았다는 점은 《마녀》의 성취로 꼽을 만하다. 다만 미디어가 여고생을 그리는 대표적 이미지들은 자윤의 명랑한 친구 명희의 몫으로 남는다는 한계 역시 분명하다. 

 

2017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악녀》 ⓒNEW

 

그간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 중에는 인상적인 액션 설계를 선보이고도 드라마에 스스로 발목 잡힌 작품들이 있다. 《악녀》가 대표적이다. 개별 액션 시퀀스의 짜임새는 완성도가 높은 편이지만, 주인공 숙희(김옥빈)를 둘러싼 서사를 단순하게 치환해 보면 사랑에 배신당한 여성의 상투적 드라마였다. 숙희와 마찬가지로 모성 때문에 주저앉은 《미옥》(2017)의 현정(김혜수) 역시 아쉬움이 남는 캐릭터였다. 《마녀》는 이 위험에서는 멀찌감치 비껴 서 있다.

 

《마녀》는 《아키라》(1988)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4, 《경성학교》)의 도전을 떠오르게도 한다. 오토모 가쓰히로의 장편 애니메이션 《아키라》는 극 중에서 정부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추진했던 생체실험을 주요 배경으로 놓는다. 이 실험으로 인해 우주의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인간 병기들이 길러졌고, 아이들은 폭주한다. 미스터리 호러로 시작해 점차 판타지 액션이라는 장르적 정체를 드러내는 《경성학교》는 1938년, 경성의 한 여자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일본의 생체실험에 이용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초인적 힘을 지닌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환영할 만했지만, 소녀를 체제의 희생양으로 삼은 묘사는 아쉬웠다. 아름다움을 강조한 이미지들로 소녀들을 대상화해 그렸다는 점에서도 한계를 지닌다.

 

결과적으로 《마녀》는, 한국영화계에서 비록 그 수가 현저히 적지만 그간 유의미하게 시도돼 온 여성 액션영화의 한계들을 흡수해 극복하려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여성 액션 연작이라는 새로운 시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나친 감정이나 여성성에 발목 잡히지 않는 초인적 여성 캐릭터의 탄생은 가능한가. 그리고 그 서사는 지속이 가능할 정도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가. 《마녀》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