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비핵화 시간표’, 버티는 北, 달래는 美
  • 김원식 국제문제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7.13 10:40
  • 호수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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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비핵화 시간표 답보 상태에 북·미 氣싸움 팽팽

 

“우리는 ‘세 개’의 포괄적인 문서(‘three’ comprehensive documents)에 합의했다. 아니다. ‘세 개(three)’가 아니고 ‘상당히(pretty)’다.”

 

지난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취재하던 기자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각국의 언론사들은 정상회담에 소수의 기자들을 파견해 현장 취재를 한다. 문제는 풀기자단에 속한 한 미국인 기자가 트럼프 대통령이 ‘세 개의 포괄적인 문서’라고 언급했다고 기사를 타전하면서 불거졌다. 일부 한국 언론도 해당 내용을 보도했고 순간 기자들은 동영상을 돌려가며 대체 북·미 정상이 몇 가지 문서에 서명했는지 찾기에 바빴다. 결론은 북·미 정상은 한글과 영문으로 된 공동성명에 서명했고 트럼프 대통령도 ‘상당히(pretty) 포괄적인 문서’라고 언급한 것으로 정리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다소 빠른 발음에 미국 기자도 잘못 들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세 개’라고 해석한 해프닝의 파장은 상당했다. 소동은 일단락됐지만 아직도 북·미 정상회담에서 무언가 ‘이면 계약’이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은 여전하다. 그 이유는 북·미 합의 공동성명이 정말 포괄적으로 돼 있고 구체적인 이행 사항에 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 비핵화 이행 과정에 관한 언급이 전무했다. 이후 관심은 미국이 북한을 ‘믿는 구석’이 무엇인가에 대한 부분으로 쏠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7월7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회담을 벌였다. 두 사람은 이틀간의 회담 이후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 AFP 연합

 

北 비난에도 신뢰감 강조하는 美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한 소동은 최근에도 이어진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7월9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을 전격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솔직히 말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personally) 한 약속은 남아 있고 더욱 강화됐다”고 말했다. 그가 북한을 떠나자마자 북한 외무성이 ‘강도 같은(gangster-like) 요구’라며 미국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데 대한 답변이다. 북한 외무성의 성명보다도 김정은 위원장이 개인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도 읽히는 대목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더 나아가 “북·미 회담 후 김정은 위원장 명의로 나온 성명에선 그가 약속한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갈망(desire)을 계속 표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북한의 성명이 어떠한 것을 지칭하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또 북·미 고위급 회담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 명의의 성명이나 평가 혹은 관련 발언도 아직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미국은 ‘강도’라며 비난하는 북한의 태도에도 ‘북한을 믿는다’는 말만 계속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발 더 나갔다. 그는 7월9일 트위터에 “나는 김정은(위원장)이 우리가 서명한 계약(contract), 더 중요한 우리의 악수를 존중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북한의 비핵화에 합의했다”고 강조했다. 최근 폼페이오 장관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고위급 회담이 별다른 가시적인 성과 없이 끝났음에도 거듭 신뢰감을 표현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7월10일엔 기자들에게 “사실은 그(김정은)를 위한 ‘작은 선물(little gift)’을 하나 갖고 있다”고 말한 뒤 “그 선물이 무엇인지는 내가 (김 위원장에게) 줄 때 알게 될 것”이라며 궁금증을 유발했다. 한마디로 북·미 간의 공동성명을 ‘계약’이라고 표현하면서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고 북한을 달래는 모양새다. 현재 구체적인 성과 없이 다소 난관에 봉착한 북·미 협상의 물꼬를 트기 위한 몸부림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북·미 고위급 회담이 진전 없이 끝나자 미국 언론과 조야에서는 다시 대북 군사 옵션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자 폼페이오 장관은 “미국의 약속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책을 진전시켜 나가는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북한을 화나게 하는 명분을 주지 않겠다는 고육지책인 셈이다.

 

미국의 유화책에도 북한의 입장은 단호하다. 북한은 7월7일 외무성 대변인 명의의 담화를 통해 “미국이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며 “미국 측이 회담에서 끝까지 고집한 문제들은 과거 이전 행정부들이 고집하다가 대화 과정을 다 말아먹고 불신과 전쟁 위험만을 증폭시킨 암적 존재”라고 비난했다. 외신들은 즉각 북·미 간의 평화 프로세스가 위기에 처했다고 분석했다. 한 외신은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질질 끌고(drawn out) 어려울 것이라는 예리한 신호”라고 분석했다. 

 

한·미·일 3국은 7월8일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공조에 합의했다. 왼쪽부터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 강경화 외교부 장관 ⓒAP연합

 

北 “우리가 패전국이냐” 발끈

 

북한이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외무성 성명에서도 “미국은 평화체제 구축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고 이미 합의된 종전선언까지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루려는 입장을 취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미국은 자신들에게 양보나 선물을 내놓지 않은 채 일방적인 비핵화만 강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북한 관계자들이 실무회담에서 “우리가 무슨 패전국이냐”며 발끈했다는 전언은 이를 잘 말해 준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북한에서 고위급 회담을 마친 폼페이오 장관은 비핵화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북한이 최종적인 비핵화를 실행할 때까지 대북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압박도 여전히 구사한다. 북·미 협상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는 양상이다. 북한도 강력한 비난 성명에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신뢰감을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며 향후 협상의 여지는 남겨 둔 상황이다. 역사적인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현재 북·미 관계는 구체적인 성과 없이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북·미 간에 가시적인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해 송환 문제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송환됐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다. 일각에선 판을 키우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미 정상이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는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정기총회에 김정은 위원장이 참석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진행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전망이다. 하지만 ‘비핵화’에 우선순위를 두는 미국과 ‘체제 보장’에 우선순위를 두는 북한의 팽팽한 기 싸움이 당장 해결되긴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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