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독립 사이에서 사라진 노래들
  • 강헌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0 11:02
  • 호수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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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하이브리드 음악이야기] 73주년 광복절 맞아 ‘진정한 國歌’ 기다려본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을 목전에 두고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십 년간 금지되었던 납북 혹은 월북 작가들의 문학작품 해금을 허용한다. 그리고 올림픽이 끝난 가을에는 음악과 미술의 해금 조치를 단행했다. 대립 일변도로 치달으면서 동질성보다는 이질성만 강조해 왔던 남북한 간의 문화적 반목을 좁힐 첫 번째 조치였다. 

 

그러나 그 뒤로 다시 삼십 년, 2018년인 지금까지도 1988년 해금 조치 이후의 후속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창동계올림픽과 북·미 간 평화협정 분위기 속에 남북한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에서 교차 방문 공연을 벌였지만 그것들은 그저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할 뿐이다.

 

삼십 년 전의 해금 조치도 따지고 보면 그 내용상 거의 불구인, 반쪽짜리 해금이었다. ‘사상적 내용’을 담은 작품들은 해금에서 배제되었고 지금 이 순간까지 그러하다. 이른바 ‘순수 예술 작품’에 한해서만 해금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지용, 임화, 박태원 같은 문인들의 시와 소설, 이쾌대의 그림, 김순남의 음악 중 일부가 지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사회성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는 작품들은 여전히 금지의 형옥 아래 갇혀 있다. 

 

1945년 8월 광복 당시의 사진 ⓒ연합뉴스


 

여전히 요원한 북한 문화 개방

 

‘이승만+박정희 대 김일성’, 양쪽 독재 군주들 사이의 생사를 건 체제 경쟁이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상대방에 대한 증오감을 정치적으로 증폭시키는 전략을 채택하게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빨갱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레드 콤플렉스가 시민 의식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판단되는 이 시점에도, 오랫동안 금기의 영역이었던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이 이루어진 지 이십 년이 되어가는데도 북한 문화에 대한 완전한 개방은 여전히 요원하다. 사회주의 시절의 소련과 동구의 문학과 음악이 별문제 없이 수입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북한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유일한 ‘주적(主敵)’인 것인가? 

 

일흔세 번째 광복절이 코앞이다. 남북한이 ‘공식적으로’ 하나였던 1945년 8월15일 해방의 날부터 남북한 단독정부가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1948년 8월15일까지의 삼 년간의 시간은 연합군에 의해 임의적으로 그어진 38선이 분단의 장벽으로 실체화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 식민지 국가의 해방은 독립과 동의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해방 투쟁의 동력과 압제에서 벗어난 환희를 담고 있는 노래가 새로운 독립국가의 국가(國歌)가 되는 것 또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1945년 8월의 한반도는 해방의 만세 소리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미군과 소련군의 서울과 평양 진주를 목격해야 했다. 한반도의 해방은 양 강대국 군대의 진주와 그 군대에 의한 통치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이어졌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 간의 대리전이 엉뚱하게도 극동아시아의 한구석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삼 년간의 결론이 마침내 분단의 획정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민족 모두가 공유하는 해방과 독립의 노래를 갖지 못했다. 해방 일주일 후인 8월22일, 종로2가에 모인 대중음악계 인사들은 해방의 노래를 만들기로 중지를 모으고 작사가 조경환이 만들어 온 노래말 《사대문을 열어라》를 채택해 김용환에게 작곡을 맡겼다. 이 노래는 바로 음반까지 만들어졌지만 널리 퍼지진 못했다.  

 

김순남 작곡가(왼쪽)와 김성태 작곡가 ⓒ연합뉴스​


 

좌우로 나뉜 정국, 좌우로 갈라진 음악

 

1945년 9월부터 정국은 좌우로 나뉘었고, 해방의 음악조차 좌우로 갈라진다. 나운영 작곡의 《건국의 노래》와 김성태 작곡의 《독립행진곡》(이 노래는 나중에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해방가》라는 제목으로 널리 불리게 된다)이 우익 진영의 노래라면, 김순남 작곡의 《자유의 노래》 《해방의 노래》 《건국행진곡》과 같은 노래들은 좌파 진영의 집회를 통해 널리 불리었다.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나중에 북한 국가인 《애국가》(부제로 《조선은 빛나라》)의 작곡자가 되는 김원균이 해방 다음 날 작곡했다는 《조선행진곡》이 유명하다.

 

이들 노래 중에서 아직도 들을 수 있는 노래는 북한의 인민작곡가 김원균의 《조선행진곡》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정도고, 나머지는 남북한 모두에서 잊혀졌다. 작곡 당시 평론가 박용구로부터 일본 제국주의 군가의 음율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혹평받은 《독립행진곡》만이 80년대 대학가 운동권에 의해 되살아나는 역설이 있었을 뿐이다. 

 

김순남과 이건우 같은 조선음악가동맹의 천재 작곡가들이 만든 해방 노래는 그들이 월북했다고 해서 남쪽에서는 금지되었고 북쪽에서는 남로당 숙청 때 남쪽에서 올라온 자에 의한 음악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본래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던 김원균은 《조선행진곡》에 이어 1946년 아직도 북한의 공식 행사에서 예외 없이 연주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만들어 주가를 올렸고, 그것은 그다음 해인 1947년 북한 국가 작곡 위촉으로 이어졌다. 남한은 식민지 시대 미국 유학 중에 만들었던 안익태의 곡 《애국가》를 공식적이진 않았지만 사실상의 국가로 지정하게 된다. 하지만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국가로서의 명분이 더욱 떨어졌다. 

 

해방과 독립, 그리고 혼란과 비극을 극복하고 도약한 대한민국의 에너지를 담을 진정한 국가를 73주년 광복절에 즈음하여 다시 한번 기다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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