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무죄 후폭풍①] 안희정 무죄가 쏘아올린 공, 국회 바꿀까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8.08.23 17:00
  • 호수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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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 안희정 무죄에 공식 논평 안 낸 민주당에 “비겁한 침묵”

 

선고는 매서운 기폭제가 됐다. 8월14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1심이 무죄로 판결 나면서, 이를 주시하던 시민들의 분노에 더욱 기름을 부었다. “안희정도 유죄, 사법부도 유죄.” 선고 직후 거리는 1심 판결을 규탄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올해 초부터 쏟아진 미투 사건 중 첫 번째 판결인 탓에, 이번 결과가 향후 사건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거란 관측이 많다. 

 

정치권도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게 됐다. 특히 1심을 선고한 재판부가 이번 무죄 판결을 ‘현행법상의 한계’라고 지적하면서, 줄곧 미진했던 법 개정 필요성이 입법부인 국회를 향해 쏟아졌다. 그간 미투 열풍 속에서 국회는 목소리만 컸지, 알맹이 있는 행동을 하진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정치인이 개인의 인기를 위해 미투를 논하고, 막상 ‘내 얘기’ ‘내 업계 얘기’가 되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는 것이다. 때문에 거리로 나온 시민들과 이들을 대변해야 하는 국회 사이 온도차는 늘 크기만 했다. 

 

8월1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회원 및 참가자들이 제5차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를 열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민주당 침묵은 책임 방기”

 

특히 이번 안 전 지사 선고 후 더불어민주당이 보인 ‘어색한 침묵’은 연일 비판의 대상이 됐다. 선고 직후 민주당을 제외한 각 당은 일제히 공식 논평을 통해 사법부의 무죄 판단에 대한 강한 유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미투 관련한 사안에 늘 앞장서 입장을 내놓던 민주당이 이번 일에 대해선 특별한 논평을 내놓지 않은 채 침묵을 택했다. 

 

정춘숙·금태섭 등 선고에 대해 즉각 개인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낸 극소수의 민주당 의원들은 이러한 당의 판단에 아쉬움을 표했다. 금태섭 의원은 “성 평등·페미니즘이 향후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될 텐데, 이 문제에 집권여당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건 아쉬움이 크다”며 “약자를 위한다 말하는 당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못 한 데 대해 특히 여성 지지층에 상당한 실망을 줬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8월17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주도한 ‘비동의간음죄 관련 여성의원 긴급간담회’에도 민주당 여성의원들은 불참했다. 비동의간음죄는 선고 당시 재판부가 ‘입법 미비’를 문제 삼으며 무죄의 가장 큰 근거로 지목한 부분이다. 이 모임에 참석한 한 야당 소속 여성의원은 “언론엔 야당 여성의원 간담회라고 나왔지만 민주당 여성의원들에게도 사전에 이번 간담회 참석 요청을 한 것으로 안다”며 “전체적인 취지엔 다들 동의했겠지만, (안 전 지사가) 한때 민주당 내 유력 대선주자였고 또 지금 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참석에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당장 여성단체에선 민주당을 향해 여당답지 못한 ‘비겁한 태도’라고 비판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다른 건이었으면 분명 바로 입장을 냈을 텐데, 안 전 지사의 네트워크가 지금도 당내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부대표 역시 “민주당 의원들이 과거 하얀 장미를 가슴에 달며 미투에 지지를 표하고 여러 번 응원의 입장을 밝혀 왔는데 이번 태도는 책임 방기로 보인다”며 “미투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당은 미투 운동 초반, 당 내에 젠더폭력특별위원회를 설치해 미투 사건에 적극 대처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3월8일 여성의 날엔 논평을 통해 “위계와 권위를 이용한 성폭력과 억압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보인 태도로 인해, 당의 입장이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대변인실은 8월20일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지도부 차원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받은 게 없었으며 향후 이와 관련해 논평을 발표할 계획도 현재로선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안 전 지사가 탈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당에선 어느 정도 선을 그으려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8월22일 국회에서 열린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 뒤늦게 미투 법안 처리 움직임

 

민주당은 안 전 지사 선고에 대한 직접적인 입장은 피하는 한편, 이로 인해 거세진 미투 관련 입법 논의엔 적극 나서는 모양새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당 역시 이번 선고에 대한 민주당 태도를 정쟁으로 몰아가지 않으려 자체 단속에 나서고 있다. 입법 미비에 대한 사법부의 직접적인 지적과 시민들의 비판이 있었던 만큼 국회 내부 총질은 삼가야 한다는 분위기다. 

 

올해 초부터 쏟아진 미투 관련 법안은 132건에 달한다. 이들 중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아직 0건이다. 여성가족위원회에 34건, 법제사법위원회에 36건 등 9개 상임위에 고루 나뉘어 계류돼 있다. 이 가운데엔 뜨거운 감자인 ‘비동의간음죄’를 담은 형법 개정안도 다수 포함돼 있다. 지난 3월 법안이 앞다퉈 발의됐을 당시 조속히 통과됐다면, 이번 안 전 지사 선고에 적극 활용돼 선고 결과까지 뒤바꿀 수도 있었을 거란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의원들 사이에 법안 처리 과정이 미진했던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은 “그동안 비동의간음죄 법안 논의가 번번이 막혔다”며 “재판부가 이번에 입법부 탓으로 돌렸으니 이젠 정말 적극적으로 통과시켜 항소심에선 더 선도적인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8월21일 국회에서 열린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선 그간 말을 아꼈던 여가위 소속 의원들 모두 작심한 듯 안 전 지사의 무죄 판결에 대해 강하게 성토했다. 의원들은 “안희정이 무죄이면 대한민국이 유죄” “안 전 지사 무죄가 자칫 미투 운동에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다”는 등 거리의 목소리를 뒤늦게 국회로 끌어왔다.

 

나아가 여가위 소속 의원들은 이튿날 기자회견을 열고 위원회에 계류된 34건의 법안을 우선 통과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민주당 소속 전혜숙 여성가족위원장은 법안 처리에 그동안 국회가 적극 나서지 못한 이유를 ‘사회적 합의의 부재’로 꼽으며, “미투 법안을 여성들의 문제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 통과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수의 여성의원 사이에선 “사회적 합의에 앞서 국회 내 합의부터 이뤄내는 게 과제”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금처럼 미투 법안에 온 관심이 쏠려 있는 분위기에도 법안의 최종 통과 여부에 대해 여전히 이들은 회의적이다. 남성 중심으로 이뤄진 국회에서 끝까지 이러한 공감대가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인 것이다. 

 

 

“사회적 합의 앞서 국회 내 합의부터”

 

민주당이 침묵하던 중에도 가장 먼저 안 전 지사 선고를 비판했던 정춘숙 민주당 의원은 “지금은 의원들이 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만 국회에서 법안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 지금과 굉장히 다른 상황이 연출돼 또다시 시간이 지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야당 소속의 한 여성의원 역시 “당장 법안을 심사하는 법제사법위원회도 대부분 남성의원으로 이뤄져 있어 제대로 공감대를 형성할지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한편 국회 밖에선 이제라도 대책 마련에 속도를 내는 국회에 안도하는 동시에, 법안 처리에만 집착하는 데 대한 우려도 표하고 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단순히 법안 한두 개 새로 만들고 고치는 게 상책은 아니다”며 “실제 법이 정비돼도 마냥 상황이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금과 같이 피해자 말을 믿지 않고 피해자가 모든 걸 입증해야 하는 분위기는 새 법이 몇 개 만들어져도 똑같을 거란 의미에서다. 그는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데만 그치지 말고 정치권이 이를 담론으로 만들어 꾸준히 논의해 나가는 적극성과 지속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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