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④] 인간 병기 위해 지옥 훈련 ‘죽음의 땅’
  • 김지영 기자 (young@sisajounal.com)
  • 승인 2018.09.01 11:17
  • 호수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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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예산 해마다 큰 폭 증액 과거사위 “상부서 예산 착복·횡령” 추정

 

평범한 민간인은 어떻게 인간 병기로 둔갑했을까. 실미도 공작원 31명의 훈련 목표는 오직 하나.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 했던 1968년 1·21사태의 북한 124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실미도부대원들은 북한에 침투했다가 체포되면 수류탄을 입에 물고 자폭하도록 훈련받았다. 2005년 8월 국방부의 ‘실미도사건 진상조사TF’(국방부 TF)의 ‘실미도사건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6개월 훈련 결과 공작원들은 6km를 124군보다 1분 빠른 26분에 완주했다.  

 

1971년 8월23일 실미도사건(8·23사건) 직후인 그해 8월30일 국방부 군특명검열단이 작성한 ‘군특수범난동사건조사보고서’엔 3년4개월 동안 실미도에서 진행된 교육 과정이 나온다. 공작원들은 총 6829시간, 하루 평균 8시간 훈련받았다. 체력단련(1150시간), 화기(964시간), 태권도(886시간), 장애물 통과(706시간), 산악 훈련(560시간), 게릴라 전술(505시간), 매복 습격(415시간), 해상침투 훈련(298시간) 등에 집중됐다. 

 

훈련 결과 산악을 시간당 10km 이상 주파할 수 있었다. 사격 명중률은 98% 이상. 태권도와 호신술도 숙련됐다. 기구(氣球)와 낙하산 훈련을 통해 공중침투도 가능해졌다. 특히 야간 공중침투 방법으로 서울 오류동에서 경북 포항까지 9회 이상 기구 훈련을 실시했다.

 

국방부 TF는 “초기 6개월 동안 매우 강도 높은 교육훈련이 실시됐다. 훈련 강도는 6개월 후에도 비교적 엄격하게 유지됐다. 하지만 1971년 8월23일 실미도사건 약 1년 전부턴 창설 당시의 지휘계선이 교체(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에서 1969년 10월 김계원으로 교체)되면서 비롯된 무관심, 임무투입 목표 상실에 따른 무력감, 공작요원과 기간병 간의 기량 차이로 인한 통제력 약화 등으로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분석했다. 

 

실미도부대원들의 훈련 중 가혹행위는 일상사였다. 사진은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 © 시네마서비스 제공


 

北 124군 능가…시간당 산악 10km 주파 

 

훈련 중 부상과 폭행, 기합 등 가혹행위는 일상사였다. 장애물 훈련 중 기관총 탄환에 옆구리 관통상을 입기도 했다. 장애물 통과 시간을 경과하자 교관이 참호 입구에 대고 기관총을 쐈기 때문이다. 야구방망이 찜질과 주먹질, 발길질도 다반사. 기합을 받다 폭행으로 고막이 터졌다. 훈련 성적 저조를 이유로 바닷물에 처박혀 짓밟혔다. 바닷가 모래밭에 얼굴만 나오게 파묻히는가 하면 화장실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다.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8·23사건 생존 공작원이었던 김창구 등 4명은 당시 군법회의에서 “공작원들 봉급은 최초 3개월은 1인당 매월 3200원씩 도합 9600원 지급됐다. 하지만 그 후는 지급된 사실이 없다”며 “받은 급료는 전혀 써보지도 못했다. 조장이 전부 가지고 있다가 소대장이나 교관이 외출 나갈 때 외출비로 바쳤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달달 볶고 기합과 고통이 심했기 때문이다.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하여 상납했다”고 진술했다.(재판기록 3권)

 

급식과 부식도 부실해졌다. 최초 3개월은 군용이 아닌 일반미와 쇠고기 등 최고급으로 보급됐다. 이후 주·부식이 빈약해졌다. 굶주린 공작원들은 개밥, 돼지 먹이를 몰래 훔쳐 먹고 뱀을 잡아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공작원 이서천 재판기록엔 “입대 후 1개월 동안은 쌀밥에다 쇠고기(사골)국이 나왔고 계란도 한 개씩 줬다. 그 후부터 고기국도 나오지 않고 된장국 또는 소금국에 보리밥을 주다가 (실미도사건이 터지기) 약 1년 전부터는 수제비로 대용하고 또는 보리밥에 소금국, 시래기국 등 부식이 아주 나빠졌다. (실미도사건) 약 1개월 전부턴 밀밥을 해줬다”고 나온다.(재판기록 1권) 공작원들은 조장들을 통해 “배가 고프다”고 상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육대장으로부터 돌아온 말은 “우리나라는 풍부한 나라가 못 되기 때문에 잘 먹을 수 없다. 인내력을 길러야 한다”는 훈시였다.(1971년 8월30일 국방부 군특명검열단 ‘군특수범난동사건조사보고서’) 

 

 

실미도 훈련 중 공작원 7명 사망

 

그렇다고 해서 실미도부대 예산이 줄거나 부족했던 건 아니다.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의 ‘실미도사건 진상조사보고서’(실미도보고서)엔 “남북관계 변화로 북파 가능성이 점차 줄어든 상황에서도 매년 큰 폭으로 증액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미도부대 공작원과 기간병을 배불리 먹이고 상당한 대우를 해 줄 수도 있는 규모”였다. 하지만 공작원들 처우나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다. 봉급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과거사위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내려온 예산이 실미도부대 운영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공작원 급여가 지급되지 않아 상부에서 착복 또는 횡령됐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서신왕래도 금지됐다. 라디오가 비치됐으나 뉴스 등 시사 보도는 청취할 수 없었다. 휴가도 외출도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인권 무풍지대’ 실미도는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훈련기간 동안 사망사건도 잇따랐다. 1968년 7월10일 무의도에서 실시된 야간 독도법 훈련에서 2인1조로 편성된 A조 공작원 이아무개와 신아무개가 집결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민간에 숨어 있던 이들은 주민신고로 붙잡혔다. A조 소대장 이아무개 소위가 다른 공작원들에게 천막봉을 들게 했다. 포복한 2명을 때리도록 명령을 내려 물을 끼얹어 가면서 무수히 때려 절명케 했다.(재판기록 2권) 공작원 조아무개는 1969년 8월22일 수영훈련 도중 익사했다. 사고사인지 기간요원의 보호조치 불이행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하극상을 이유로 공작원을 집단 구타해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1970년 8월 공작원 윤아무개는 기간병인 박아무개 병장과 함께 인근 무의도로 사역을 나갔다. 거기서 박 병장이 찬 권총을 빼앗아 술을 사줄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윤아무개는 동료 공작원들에게 구타를 당해 살해됐다. 한 공작원의 재판기록(2권)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동료들끼리 적지에 가서도 임무 수행도 못하고 국가를 팔아먹을 놈(공작원 윤아무개)이라고 단정, 사형에 처하자고 합의. 연병장에 묶어 놓고 공작원 전원이 몽둥이를 들고 마구 때려죽인 후 화장처리 했다.’

 

탈영한 공작원 3명이 강간 사건을 벌인 후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1970년 늦가을 공작원 황아무개, 강아무개, 또 다른 강아무개 3인이 탈영, 인근 무의도로 건너가 무의초등학교 숙직실에서 마을 처녀 2명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 3명은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한 실미도부대 기간병과 공작원에 맞서 마을 주민들을 인질로 대항했다. 

 

투항을 거부한 공작원 강아무개가 황아무개를 칼로 찔러 사망케 했다. 또 다른 공범 강아무개 복부를 찔러 중상을 입혔다. 자신 역시 목을 찔러서 부상을 입었다. 강아무개는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내무반에 이틀 동안 방치됐다가 사망했다. 또 다른 강아무개는 파견대장과 소대장 지시를 받은 공작원에 의해 대검으로 살해됐다. 

 

1971년 8월23일 실미도부대원 24명이 민간버스를 탈취, 서울 노량진까지 나왔다가 진압됐다. © 뉴스뱅크이미지


 

“실미도부대 해체” 건의 묵살당해

 

무의초교 강간 사건 이후 공작원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교육대장과 파견대장 등은 공작원들의 하사관 임관이나 사회복귀 등을 상부에 수차례 건의했다. 하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처음 약속과 달리 임무가 주어지지 않고 장기간 격리생활로 부대이탈과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공작원 신분 변경이나 부대 해체 등 근본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대책이라고 고작 내놓은 게 ‘특수위안’이었다. 8·23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1971년에도 김두만 공군참모총장이 정래혁 국방부 장관에게 두 차례에 걸쳐 실미도부대 해체를 건의했다.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23사건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상실했던 것이다.  

 

1968월 4월1일 31명으로 창설된 실미도부대. 이들 가운데  7명이 훈련 중 사망했다. 남은 24명의 불만은 시나브로 쌓여갔다. 그리고 결국 1971년 8월23일 활화산으로 폭발했다. 이들은 이날 “중앙청이나 사령부로 가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자”고 결의하고 서울로 이동했다. 서울 대방동 삼거리에서 경찰과 2차 교전을 벌였고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했다.

 

당시 생존자 김병염 등 4명은 구속됐다. 가족에겐 고지되지 않았다. 비공개로 열린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2심 항소는 기각됐다. 과거사위는 “공작원들이 당국의 회유에 의해 상고(3심)를 제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해 12월30일 사형이 확정됐고 이듬해 1972년 3월10일 집행됐다.

 

당시 실미도부대원들이 탈출한 원인에 대해 정보사령부의 ‘실미도사건 관련 정보사 대응결과’(2003년 4월)엔 이렇게 적혀 있다. “가혹한 훈련 및 인권유린, 극도로 나빠진 처우 등에 불만, 특수대원들에 대해 제시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였다. 공군보안부대 수사관으로 당시 8·23사건을 조사했던 이아무개 상사는 과거사위 조사에서 “(공작원들의) 탈출동기를 조사했는데 공작원들은 처음 약속과 달리 북파는 하지 않고 시간만 끌고 있는 등 자신들의 대우가 너무 열악해 탈출했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생존 공작원 이서천은 군법회의 재판 과정에서 “사령부나 청와대에 가서 실미도 실정을 폭로하고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경우 자폭할 것을 사전에 각 조장들이 결의”(재판기록 2권) 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실미도 탈출은 우발적이거나 하극상에 의한 난동으로 보기 어렵다. 장기간 격리돼 가혹한 훈련과 열악한 처우, 인권유린을 당한 공작원들. 이들이 ‘온건한 방법’으론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집단 탈출한 사건이다. 국가에 배신당한 사실을 국정책임자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했던 그들. 그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 

 

※‘실미도’ 특집 연관기사 

☞[실미도①] (단독) ‘실미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上)

☞[실미도②] (단독) ‘실미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下)

☞[실미도③] 감언이설에 포섭당한 민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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