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③] 감언이설에 포섭당한 민간인들
  • 김지영 기자 (young@sisajournal.com)
  • 승인 2018.09.03 09:15
  • 호수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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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4월1일 창설된 ‘북파공작원 훈련소’ 실미도부대. 그 실체와 운영을 둘러싼 의혹은 여전하다. 그나마 국방부와 국가정보원(당시 중앙정보부) 자료, 재판기록 등으로 실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실미도부대는 남북 냉전 최정점에서 태동했다. 1968년 1월21일 북한 124군 부대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청와대를 급습했다. 1·21사태(김신조 사건)였다. 이틀 후인 1월23일엔 북한이 원산항 근처에서 미국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Pueblo)호를 나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승무원 83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일촉즉발 정세였다. 결국 박 대통령은 1968년 1월26일 청와대에서 긴급비상회의를 갖고 독자적인 대북응징보복 방침을 수립하라고 하달한다. 

 

총대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이 멨다. 김일성 거처와 1·21사태를 일으킨 북한 124군을 습격할 특수부대 창설을 추진한다. 중앙정보부(중정)는 공군2325부대 정보·보안 업무의 조정·감독권을 가지고 있었다. 실미도부대 훈련을 공군2325부대가 맡은 이유다. 중정은 실미도부대 예산을 지원했다. 정기적으로 실미도를 방문해 훈련 상태도 점검했다.

 

2325부대의 실미도 공작원 모집팀은 전국 각지에서 대상자를 물색했다. 경찰서와 교도소, 갱생보호회, 교도소 등을 훑었다. 그렇게 공작원 31명이 뽑혔다. 1·21사태의 북한 124군 31명과 같은 수였다. 

 

2325부대의 ‘공작원 모집결과 보고서’(1968년 4월14일)에 따르면, 당시 이들 나이는 21~36세. ‘특기 및 중요경력’엔 ‘당수·권투·운전·전기공·합기도·무도·마라톤·축구·요리사·써커스(서커스)·수영·유도·통신·뽕나무 접사·리발(이발)견습·편물기계수리·칼 사용’ 등으로 기록돼 있다. ‘깡패·절도·소매치기’ 등도 눈에 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는 2006년 “일부 전과자 출신 등을 최종 선정한 이유가 사회로부터 장기간 격리시켜도 가족이 찾지 않을 것에 착안했다”고 분석했다.  

 

2017년 8월23일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에서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뉴스뱅크이미지

 

“전과자 출신, 가족이 찾지 않을 것”

 

공작원 모집관들은 공작원 포섭 과정에서 특수훈련 위험성과 북한 침투로 인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 군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채용했다. 채용조건도 사실상 이행하기 어려운 사항들이었다. 공군2325부대가 중정에 상신한 ‘특수공작 기본공작계획서’(1968년 3월28일)에 따르면,  △채용과 동시에 현역사병 계급 부여 △교육수료 후엔 하사관 또는 장교 임관 △상당액의 특수수당 지급 △북한 침투 귀환 후엔 후방에서 교관 등으로 채용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서는 김형욱 중정부장 승인도 받았다. 공작원 모집관들은 전국에 거점 여관을 정해 놓고 대상자를 만나 “국가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하니 지원하라”고 설득했다. 병역 기피자나 탈영병에겐 구제를, 군 미필자에겐 군 경력 인정을 약속했다. 상당액의 봉급과 목표 달성 시 성과급 지급도 제시했다. 공군2325부대 공작과장 정아무개 중령은 과거사위 조사 때 공작 대상자들에게 이런 조건을 제시했다고 털어놨다. △3~6개월 훈련기간 중 보수 지급 △신탄진 담배지급 등 장교후보생 대우 △외출·외박 실시 △훈련 종료 후 소위 임관 △임무수행 복귀 후 원하는 곳 배속, 미군부대 취직 등이었다. 

 

8·23사건 현장에서 생존한 공작원 4명의 군법회의 재판기록엔 이렇게 나온다. 김병염은 모집관에게서 “임무기간 중 월 600불씩 지급, 3~6개월 훈련기간 중 주·부식은 특별히 잘해 주고 이틀에 신탄진 (담배) 한 갑씩 지급, 외출 자유로이 보내며 서신왕래도 할 수 있음”을 약속받았다고 밝혔다. 이서천의 재판기록엔 “임무는 사진촬영을 해 오는 것”이고 “훈련 장소는 민가가 없는 산악지대”라 적혀 있다. 

 

공작원 임성빈은 “6개월간 훈련을 받고 이북에 갔다 오면 원하는 데로 배속 (시켜주고), 훈련은 좀 고되나 이북에 가서 김일성 모가지를 비트는 임무였고 교육지가 섬이 아닌 서울”이라는 제안을 모집관에게서 들었다고 진술했다. 공작원 대상자들에게 모집관의 제안들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밋빛 미래, 급출세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과거사위의 ‘실미도사건 진상조사보고서’(실미도보고서)엔 “국가는 실미도부대 공작원이 공작훈련과 활동을 이행할 경우 장교·부사관으로 임용시키는 등 일정한 대가를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했는데 이는 고용계약상 청약행위에 해당한다. 실미도부대 공작원은 이 같은 대가를 조건으로 공작훈련과 활동 이행을 승낙하면서 실미도부대에 입소했다. 그러므로 공작원들은 결국 이 같은 고용계약을 승낙하고 계약 이행으로서 실미도부대에 입소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약속됐던 미군부대 취직은 애초부터 불가능

 

문제는 계약 이행이 처음부터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실미도보고서엔 “모집관들은 공작활동 성공 시 ‘장교·부사관으로 임용’시켜주고 ‘미군부대에 취직’시켜주며 ‘원하는 직장에 취직’시켜주는 등 보상을 약속했다”면서 “‘부사관·장교 임용’은 법상 임용절차 및 자격이 정해져 있는데 실미도부대 공작원의 경우 이 같은 임용절차를 통과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결격사유인 ‘금고 이상의 전과를 가진 자’가 있으므로 처음부터 부사관·장교 임용은 사실상 불가능한 약속”이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미군부대 취직도 미군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우리나라가 일방적으로 약속해 줄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이행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결국  국가는 실미도 공작원과 계약단계부터 청사진이 아닌 이행 불가능한 ‘흑사진’을 제시했던 셈이다.​ 

 

※‘실미도’ 특집 연관기사 

☞[실미도①] (단독) ‘실미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上)

☞[실미도②] (단독) ‘실미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下)

[실미도④] 인간 병기 위해 지옥 훈련 ‘죽음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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