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전투, 영화처럼 ‘다윗과 골리앗’ 싸움 아니었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8.10.1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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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수십만 대군을 어떻게 이겼는지’ 놓고 역사학계 의견 분분

고구려 안시성 전투를 그린 영화 《안시성》은 지난 9월19일 개봉 후 10월17일 현재까지 538만여 관객을 모았다. 총제작비 220억원을 들여 관객들에게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20만 당나라 최강 대군 vs 5000명의 안시성 군사들. 40배의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전사들은 당나라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는데…….' 영화 제작사에서 소개한 줄거리 중 한 부분이다.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서 영화 《안시성》 홍보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 연합뉴스


 

안시성 전투, 정말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나 

 

줄거리처럼 이 영화의 큰 틀은 한마디로 '다윗(안시성)과 골리앗(당나라)의 싸움'이다. 헐리우드 영화 《300》의 분위기도 많이 차용했다. 스파르타(안시성)와 레오니다스왕(양만춘) 대(對) 페르시아(당나라)와 크세르크세스왕(당 태종 이세민)의 구도가 일치한다. 《300》과 비슷한 감각적인 액션신에 취해 있다가 후반부로 가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잘 싸우고 용맹한 건 알겠는데,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은 단판으로라도 끝났지, 안시성 전투는 수개월에 걸쳐 이어진다. 안시성 병사들도 적잖이 죽어나갔고, 고립된 상태에서 인력·물자 수급이 용이했을 리 만무하다. 심지어《300》의 스파르타 용사들은 모두 전사했는데, 《안시성》 속 주요 인물들은 상당수 살아남았다.       

 

사료가 부족한 탓에 안시성 전투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안시성주 양만춘의 이름이 직접 거론된 역사서조차 드물다. 이에 '안시성이 어떻게 당군을 이겼느냐'를 놓고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국내에서 일반적인 시각은 영화 《안시성》의 주제의식과 같다. 불굴의 의지로 말도 안 되는 승리를 쟁취한, 자랑스런 역사라는 인식이다. 고(故)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우리 역사 속에서 중국과 맞서 싸워 이긴 사례는 많지 않다"며 "고구려, 그 중에서도 안시성 전투의 승리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안시성 전투 성과가 '판타지'와 결합해 부풀려진 측면이 있을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이승수 한양대 교수는 2006년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지 '정신문화연구'에 실은 논문에서 "근대에 들어 안시성은 강성했던 고대사의 한 표상으로 성립돼 위기의 순간마다 호출됐다"며 "하지만 우리의 안시성 인식은 다분히 감상적이고 낭만적이어서 논리적 기반이 허약하다"고 지적했다. 

 

영화 《300》 중 한 장면 ⓒ 다음 영화

 

"중국 이긴 드문 사례" vs "전설일 뿐" vs "붙어 볼 만했다"
 
재야 사학자인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은 전자와 흐름을 같이 하되, 다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아니었다면서 제3의 의견을 제시했다. 심 원장은 "겨우 5000명으로 당나라 대군을 물리쳤다는 것은 '고구려는 약소국이고 중국은 대국'이라는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설정"이라며 "병력 등에서 안시성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부강했다"고 주장했다.

 

심 원장은 "중국 역사서에 '당군이 (안시성에 앞서 공격한) 요동성 병사 1만명을 죽이고 1만명은 포로로 잡았다'고 나온다. 2만 병력이란 말인데, 실제로는 더 많았을 여지가 크다"면서 "현재 우리나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안시성의 병력은 요동성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시성으로 진주한 당나라 병력의 경우 10만명에서 많게는 50만명으로까지 추정된다. 《안시성》 제작진은 '중국 역사서들에서 병력 등이 부풀려 기록됐다'는 학설과 영화적 스펙터클을 놓고 고민하다 안시성 전투에 참전한 당군 수를 20만명으로 절충했다. 아울러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쓰인 중국 역사서들은 다른 민족 관련 기록을 축소·왜곡해 왔다는 의심을 받는다. 안시성뿐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고구려 전체의 힘도 과소평가되는 부분이 있다고 심 원장은 강조했다. 

 

심 원장은 "중국 사료는 당시 고구려의 상비군이 60만명이라 적었는데, 동시대에 대한 다른 기록들과 비교할 때 더 늘려서 추정해 볼 수 있다"면서 "우리 민족이 고구려 기록을 썼다면 60만명이 아니라 100만명 이상이라 썼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그는 "기마민족에다 경제적·기술적으로도 뛰어난 고구려의 100만 대군은 농경 국가였던 중국의 100만 대군과 차원이 다르게 강했을 것"이라며 "수나라가, 이어 당나라가 고구려에 패한 것은 필연이다. 고구려가 어쩌다 대국인 중국을 이긴 것처럼 봐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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