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는 나의 살던 고향이다
  •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0.19 14:02
  • 호수 151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종교 전문기자의 공동체 사랑을 담은 조현의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갈파했지만, 이 말이 사회 시스템으로 온전하게 구현된 적은 거의 없다. 기업들은 개인주의가 자본의 이득을 취하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가능하면 가정을 나누고 있다. 혼밥, 혼술, 혼잠이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 아파트가 더 팔리고, 가전제품은 더 쓰이고, 자동차는 더 팔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진리가 돼 버리자, 세상은 혼자 사는 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아이들은 더 태어나지 않는 사회가 됐다. 한 기자가 이런 흐름에 반기를 들고 외치고 있다.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내고, 많은 강연 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인 조현 기자다. 그를 만나봤다.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조현 지음·휴(休) 펴냄·432쪽·2만원 ⓒ 조창완 제공


‘혼자 사는 세상’에 반기 들다

“우리 정부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10년간 160조원을 쏟아 부었지만 아직 명확한 효과가 없습니다. 그사이 출산율은 최저치를 경신해 부부가 한 명도 낳지 않는 시대에 빠져들었습니다. 출산율만이 아닙니다. 최근 3년간 존속살인이 한 달 평균 4.5건으로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서도 4배 이상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분노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의 해답을 공동체에서 봤기 때문에 책을 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이해 못할 한국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영어, 수학 등의 사교육에 빠져든다. 아이들은 괴롭고, 그 엄청난 학비를 대야 하는 부모들은 부모대로 속이 탄다. 하지만 이 고통의 굴레를 쉽게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의 욕심도 있지만, 타인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공포는 계속되고, 이 공포가 쌓이자,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보편적 정서가 돼 버렸다. 이런 의식이 지속되면 지구상에서 한국인이 사라지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상황이 됐다. 저명한 고승 등 종교 지도자들의 뜻깊은 말을 전하던 저자가 가장 보편적인 사람들이 같이 모여 사는 모습에 빠진 것은 같이 사는 곳에 인생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로 홀로 사는 수도자, 수행자, 출가자들을 만났다. 오지 토굴과 암자, 봉쇄 수도원들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외롭게 내면의 사욕편정과 싸우며 치열하게 구도하는 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인류에게 등대와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고립의 결과로 외골수가 되거나 정신건강도 챙기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인간 속에서 단련되고, 인간 속에서 치유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것을 가장 잘 구현하는 모습이 공동체라는 것을 알고, 공동체에 관심을 가졌다.”

저자가 공동체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일하던 신문사에서 ‘새 시대 문명 시리즈’로 공동체를 다룬 것이 계기였다. 이후 1년간 휴직을 하고 태국의 아속 공동체와 인도의 오르빌, 미국의 브루더호프, 일본 야마기시 공동체 등을 다녔고, 이후에는 한국의 공동체를 취재하거나 방문했다. 특히 딸과 함께 찾은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아이들이 더 쉽게 공동체에 적응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한국의 공동체도 다양한 모습을 만나기 시작했다. 탁구대 하나가 동네에 생기를 불러오기 시작해 이웃과 같이 사는 즐거움을 준 파주시 문발동 공방골목길을 비롯해 광주 광산구 본마공 등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에 있는 열여덟 곳의 다양한 공동체를 소개한다.

그가 전하는 공동체의 장점은 아이가 즐겁고, 어른들이 편안하고, 노후에 대한 걱정이 덜하다는 것이다. 당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이 세 세대가 가진 문제다. 아이는 과외로 치이면서 세상은 물론이고 부모까지 피곤해진다. 부모는 아이의 교육비를 만들기 위해 미래까지 포기하고, 과외의 노예가 된다.

그런데 공동체들은 이런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다. 대부분 한두 자녀를 두고 고립되는 가정이 아니라, 수십 명이 공동체에서 같이하면 아이들은 놀이와 세대별로 갖는 특성을 배울 수 있다. 공동체들 대부분은 육아를 돕는 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과 가사를 병행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이런 가운데 사회를 배울 수 있다.

“요즘 귀농귀촌을 지원하는 곳이 많습니다. 우선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돈은 조금 덜 벌어도 문화와 교육, 의료 등 삶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바랍니다. 노인들에게는 의료 등도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형태가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들은 대부분 리더가 있는 종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더러 뜻이 맞는 지인들의 기획으로 만들어진다. 충북 보은군에 있는 ‘선애빌’의 경우 1가구당 5000만원 정도가 들었지만 좋은 자리에 터를 잡는 경우도 있고, 충남 홍성군에 있는 ‘풀무학교’ 공동체처럼 반세기가 넘은 공동체들도 있다. 또 마포 ‘성미산’이나 성남 남한산성에 있는 ‘논골’처럼 도시에도 공동체들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같이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재능을 나눌 수 있다. 다양한 직업이 있고, 음식·커피·여행 등을 모티브로 하는 경우도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많은 반향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동체는 그들이 동료 시민으로서 소유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나타낸다. 즉 그들이 선택한 관계가 아니라 그들이 발견하게 되는 소속이며, 그저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구성요소”라고 말한다. 저자가 보여주는 다양한 공동체의 모습도 이 시대 우리가 되찾아야 할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