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 우리가 잊었던 엄청난 위상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1.09 10:39
  • 호수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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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대표하고 국민을 위로했던 스타

신성일 별세 후 이어진 재조명이 젊은 세대를 놀라게 했다. 그는 최근 사생활에 대한 구설이 주로 보도되면서 젊은 세대들에겐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그의 엄청난 위상을 아는 젊은 세대가 드물었다. 그랬다가 이번 재조명에 많이들 놀라는 것이다.

신성일은 상상 초월의 대스타였다. 1966년 47편, 1967년 51편 등 그의 영화들이 1964년부터 1971년 사이에 324편 개봉됐다. 이 기간 전체 한국영화 개봉작이 1194편이었다. 즉, 당시 한국영화 4분의 1 이상을 신성일이 담당한 것이다. 그를 그린 간판이 하도 많이 내걸려, 극장 간판 화가들이 신성일은 눈 감고도 그린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이렇게까지 한 나라의 영화 역량 대부분이 단 한 배우에게 집중된 사례는 전 세계에서 신성일이 유일하다.

신성일이 송중기·강동원·박보검을 합친 것과 같은 위상이었다는 보도가 나오자, 누리꾼들은 과장됐다며 실소했다. 하지만 이조차 과소평가다. 지금은 다매체 취향 다변화 환경이지만 신성일은 TV도 활성화되지 않은, 온 국민이 영화 하나만 바라보던 시대에 극장가를 장악했다. 그 존재감은 지금의 다변화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재 청춘스타 몇을 합쳐도 그 시절 신성일과 견줄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그런 시절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신성일은 그야말로 전무후무, 유일무이, 공전절후의 대스타였다. 신성일이 생전에 내비치곤 했던 자신이 ‘신성일’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젊은 사람들은 우습게 생각했지만, 그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 뉴시스


 

청춘의 아이콘 되다

서울대를 지망하는 대구 수재였던 그는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고교 졸업 후 혈혈단신 상경했다. 청계천에서 호떡장사 등을 전전하다 충무로의 한국배우전문학원에 지원했다. 이미 마감됐지만 원장이 그를 보고 특별 합격시켰다. 1957년엔 ‘신필름’ 오디션에 도전했다. 2640명의 지원자가 몰려 기마경찰까지 출동했는데, 신상옥 감독이 그를 보더니 즉시 합격시켰다. 이렇게 특별 합격이 이어진 것은 그에게 확실히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일단 서구적인 느낌이었고 키도 컸다(174cm). 여기에 더해 신성일 특유의 반항기, 불안과 애환이 서린 눈빛이 영화인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 채권자에게 폭행까지 당할 정도로 고생한 것이 그의 눈빛을 더 깊게 했을지 모른다.

이때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가 ‘뉴 스타 넘버원’ 또는 ‘신필름 스타 넘버원’이라는 의미로 신성일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본명 강신영). 신필름에서 그는 당시 유한양행 과장 급여 수준인 월급 5만환을 받으며 전화 받기와 잔심부름을 했다. 연습생에게 많은 월급까지 준 것에서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영화계 인맥을 넓혔고, 운동하는 습관을 들여 평생 탄탄한 몸을 유지했다.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고,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때 영화의 모든 신을 외울 정도로 몰두했는데, 이런 성실성이 그 후로도 이어진다. 뒤이어 《가정교사》에선 자신이 분석한 주인공 이미지에 맞게 스포츠머리로 깎아 제작자를 경악시켰지만, 이것은 한국 최초로 패션으로서의 스포츠머리 유행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신성일 머리’였다. 그리고 1964년, 18일 만에 찍었다는 《맨발의 청춘》이 개봉한다. 이 작품은 온 나라를 강타할 정도로 대히트하며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발전했다. 당대의 대표작이 됐고, 신성일은 청춘의 아이콘이며 시대를 대표하는 국민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평범한 배우들이 출연료 1만8000원 받을 때 신성일은 45만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후 청춘물이 줄을 이을 정도로 영화계에 파급력이 컸다.

1974년엔 《별들의 고향》으로 또 한 번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이 작품부터 본격적인 OST 문화가 생겨날 정도로 노래들이 인기를 끌었고, 이것은 당대 청년문화와 연결됐다. 영화는 산업화의 그늘에 소외된 여성의 이야기였다. 이후부터 호스티스물 열풍이 태동한다. 유신 정권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 사회의 그늘을 표현할 유일한 길이었다.

《맨발의 청춘》에선 강인한 건달이었는데, 《별들의 고향》에선 쓸쓸하고 우울한 중년남 역할이었다. 많이 바뀐 것 같지만 비주류라는 성격이 이어졌다. 고도성장의 수혜를 받지 못한 음지의 인물들인 것이다. 어딘가 처연하고 쓸쓸한, 그리고 불안한 그의 모습이 서민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했다. 특히 《맨발의 청춘》에서 좌절하는 모습으로 당대 청춘의 표상이 됐다. 완벽한 미남이면서도 결핍이 있는 그에게 여성들은 연민, 모성애를 느꼈다. 단지 잘생겨서만 터진 인기가 아닌 것이다.


당대의 대사건, 신성일·엄앵란 결혼식

그가 이렇게 영화에 집중하는 모습이 엄앵란에겐 좋게 비친 듯하다. 엄앵란은 신성일이 아픈 순간에도 영화만 생각했다며, “내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 55년을 함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1년에 신성일이 자서전을 발간하며 애인을 거론해 대중의 공분을 샀다. 신성일과 이혼하지 않는 엄앵란에게까지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 부부 사이엔 그들만의 특별한 유대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결혼은 당대의 대사건이었다.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 최고의 스타 커플이 되고, 바로 그해 11월14일 결혼식을 올렸다. 교통편도 안 좋던 시대에 3400여 명이 몰렸고, 초청장이 암거래됐으며 접수대가 인파에 밀려 연못에 빠질 정도로 대소동이 벌어졌다. 최무룡·김지미 등 주요 하객들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세기의 결혼으로 외신에까지 보도됐다. 그렇게 화려하게 결혼했지만 신성일은 이상적인 남편상이 아니었다. 그는 결혼 후에도 여전히 대명사 ‘신성일’로 살았고 엄앵란 ‘한풀이’ 토크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며 업적이 잊힌 것이다. 그런 가정사와 별개로, 그의 영화계 위상이 별세 후 재발견됐다. 시대를 대표하고 국민을 위로했던 스타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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