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의 경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1.30 09:29
  • 호수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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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외환위기 조명한 첫 영화…20년 지났지만 우리 사회에 IMF 잔재 여전

“제 판단으로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입니다!” 모두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취해 있던 1997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은 위기를 직감했다. 정책 관료들은 머리를 맞댔지만, 결국 나라는 망했다. 국가 경제 허리를 책임지던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은행들은 우왕좌왕하고, 중산층 가정들은 비탄에 빠지고, 국민은 절망했다. 가열찬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비정규직이 쏟아졌다. 그리고 자살률이 치솟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한국 경제의 ‘국치일(國恥日)’로 역사에 새겨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조명한다. 한국 상업영화가 이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본격 조명한 첫 사례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 CJ 엔터테인먼트

 

위기 사태에 대처하는 자세 제각각

한시현의 예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왜 대응책을 마련할 시간도 없이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을까. IMF 당시 비공개로 운영됐던 대책팀이 있었다는 한 줄의 기사에서 출발한 《국가부도의 날》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비밀에 다가선다. 거기엔 한시현처럼 ‘모두의 대한민국’을 걱정한 사람도 있었지만, ‘기득권자들의 대한민국’만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IMF 체제가 ‘시위만 하는 노동자들’로부터 국가 경제 체제를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라고 믿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국가의 부도 뒤엔 한국 경제 관료들의 끔찍한 패착과 무책임한 탐욕이 있었음을 고발한다. 컨트롤타워의 실질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관료들이 제 역할을 못할 때 국민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우린 역사를 통해 너무나 많이 목격해 왔다. 어쩌면 막아낼 수 있었던 위기들은 왜 기어코 발생했고, 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는가. 이 영화엔 안타까운 한숨이 절로 따른다.

여기, 위기를 직감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믿는 사람. 금융맨 윤정학(유아인)이다. 모두가 폭탄주에 취해 있을 때 윤정학은 외국 투자사의 철수 조짐을 파악한다. 실물 경제의 이상 징후도 포착한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 경제가 망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한 그는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와 개인 투자자들을 모은다. 그런 그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건, 역시 나라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무능한 관료가 아닌, 국민의 탓으로 돌리는 정부의 거짓말. 그런 정부의 말에 춤추는 언론.

판단의 기로 앞에서 윤정학을 붙들어 매는 건 ‘의심’이다. 거짓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는 매번 자기암시를 건다. “나는 절대 속지 않아!” 윤정학은 위기를 이용해 한몫 잡으려는 현실주의자이자 혹은 기회주의자의 면모가 다분한 인물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국가가 위기 상황에서 국민을 지켜주지 못할 때,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는 마지막까지 정부와 언론을 의심했고, 의심했고, 또 의심했다. 슬프지만, 그것이 그가 대박을 터뜨린 이유다.

그리고 국가 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사람, 국민의 대다수를 대변하는 인물 갑수(허준호)가 있다. 그가 원한 건 일확천금이 아니다. 그저 내 가족이 큰 어려움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소시민일 뿐이다. 그의 판단 착오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의 흐름을 너무 맹신했다는 것이다. 현금 대신 받은 어음이 휴지 쪼가리가 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많은 국민이 갑수 같은 판단 착오를 했다. 그들이 무능해서? 경제에 무지해서? 돈을 너무 함부로 굴려서? 당시 은행들은 별다른 규제 없이 돈을 무분별하게 유통했다. 당국은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다. 은행 헤드들 역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만이 현실 능력을 앞서갔다. 갑수를 비롯한 많은 서민이 IMF에 고꾸라진 건, 금융 시스템의 이러한 허점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는 IMF가 지난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 CJ 엔터테인먼트



《국가부도의 날》의 성취와 아쉬움

이처럼《국가부도의 날》에는 국가의 위기를 어떻게든 막으려는 자의 안간힘과 기득권 세력에 편승해 이득을 챙기려는 자의 노림수가 부딪치고, 위기에 베팅하는 자와 위기를 숨기려는 정부 사이의 숨바꼭질이 이어지고, 위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자의 눈물이 흐른다. 각 인물이 IMF 비극의 퍼즐을 이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흡사 재난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 그려내는 과정에서 《국가부도의 날》은 한 가지는 확실히 성공했고, 한 가지는 명백히 실패했다. 일단, 이전 한국 상업영화들과 달리 시스템의 문제를 ‘가족 신파’로 만들지 않은 건 엄청난 성취다. 그동안 비슷한 문제를 다룬 많은 상업영화가, 사건보다 가족을 중심으로 끌어와 눈물을 강요해 왔던 게 사실이니 말이다. 특히나 IMF는 너무나 많은 중산층을 무너뜨린 사건이기에, 구구절절한 가족사로 흐를 유혹이 적지 않은 소재였다. 그럼에도 《국가부도의 날》은 이성적 판단을 최우선하는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을 중심에 세우며 눈물에 휩쓸리지 않는다. 소재상 세련된 접근이다. 그로 인해 어려운 전문용어들이 넘치긴 하지만, 이를 포기하지 않고 담아냈기에 또한 성취다. 영화는 결코 쉬운 길로만 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캐릭터 개개인의 삶을 추적한 영화를 볼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여기에는 다소 망설여진다. 캐릭터들이 너무 기능적으로 짜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실패한 건, 이분법적 구도다. 복잡한 거미줄 같은 경제위기는 ‘선과 악’ ‘강자와 약자’로만 구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가부도의 날》은 인물들을 시소 끝과 끝에 앉힌 후 중간을 희석시켜 버렸다.

《국가부도의 날》의 안전한 투자라면, 이러한 단점들을 중화시키는 배우들의 존재감이다. 스타 캐스팅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이 엇갈리지만, 《국가부도의 날》에서는 이것이 관객의 몰입을 돕는 쪽이다. 각종 어려운 경제 용어가 영어로 쏟아지는 상황에서 관객이 길을 잃지 않고 따라가게 되는 건, 그것을 발화하는 배우가 김혜수이기 때문이다. 유리천장이 극심했을 20년 전 공무원 세계에서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주는 한시현은 김혜수에게 근사하게 어울리는 옷이기도 하다.

어려운 경제 흐름을 스피치로 전달하는 윤정학의 이야기에 이탈하지 않고 귀 기울이게 되는 건 이를 연기한 배우가 유아인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배우 특혜를 가장 크게 입은 건 조우진이 연기한 안타고니스트 재정국 차관이다. 뻔해질 수 있는 인물이 조우진이라는 배우가 입힌 그만의 개성으로 인해 뻔해지지 않았다. 《국가부도의 날》은 캐릭터의 평면성을 배우들의 존재감으로 뚫고 간 영화인 셈이다. 사실 이것은 치명적인 단점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IMF 사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국가부도의 날》이 진행형 재난영화인 이유

실제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스릴과 공포는 인물들의 위기 상황에 있지 않다. 그보다 더 큰 스릴과 공포가 폭발하는 지점은 협상 테이블에 앉은 IMF 총재(뱅상 카셀)가 구제금융 협상 개시 선결 조건으로 무리한 6개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한국 협상단을 압박할 때 나온다. 그들이 내건 조건은 ‘고금리’ ‘금융시장 전면 개방과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인투자 대폭 허용’ ‘금융사 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화’. 그러니까 한국 경제를 자신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저울질하겠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IMF 사태는 우리 국민들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비정규직 전환 동의서’가 많은 노동자에게 발급됐고, ‘명예퇴직 신청서’가 허울 좋게 강압적으로 제시됐다.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라 구조조정이 급하게 추진되다 보니, 대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양극화되는 결과도 초래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IMF가 남긴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통용되는 세상, ‘기업은 살아야 한다’는 관성적 태도가 갑질을 부추기는 세상, 개천에서 용 나는 건 불가능해져 버린 ‘수저계급론’ 세상. IMF가 낳은 흔적들이다.

IMF 사태는 영화적으로 선택하기 쉬운 소재는 아니다. 누군가에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절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스크린에서 마주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부도의 날》은 그 이유를 한시현을 빌려 꽤 직설적으로 말한다. “위기는 반복”된다고, “인생은 선택”이라고. IMF가 남긴 문제는 산적해 있고, 경제는 여전히 불안하고, 밀실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는지 대중은 깊이 알 턱이 없다. IMF 위기를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마음으로 모은 금이 대기업의 부채를 갚는 데 쓰였다는 걸 아는 이는 또 얼마나 될까. 경제 관료들의 무능에 분노하는 이들과, 열심히 살아도 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의문을 품은 이들에게 《국가부도의 날》은 말한다. 의심하라.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

 


《국가부도의 날》 심화편 보고 싶다면, 《빅쇼트》에 베팅하라

《국가부도의 날》이 공개된 후, 덩달아 호출되고 있는 영화가 있다. 브래드 피트가 제작한 《빅쇼트》다. 2008년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뒤흔든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건을 배경으로 한 《빅쇼트》에는 여러 명의 윤정학이 등장한다. 윤정학처럼 금융 시스템 붕괴 속에서 거액의 자금을 챙긴 인물들을 그린 영화란 얘기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윤정학이 어떻게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고 돈을 굴렸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관객이라면 《빅쇼트》가 최고의 안내서다. 이 영화의 원작을 쓴 마이클 루이스는 금융 위기에서 개인이 살아남는 방법을 이야기해 온 논픽션 작가다. 그의 발언은 단호하다. “‘호갱’이 되기 싫다면, 의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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