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 ‘경제현실’ 내세우다 목숨 잃은 2인자 류샤오치
  •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2.14 14:27
  • 호수 15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승준의 진짜 중국 이야기] 마오쩌둥이 빚어낸 권력투쟁 드라마(2)

1969년 11월12일, 중국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시의 시립 화장장에서 류웨이황(劉威黃)이라는 이름을 가진 71세 무직자의 시신이 화장됐다. 화장된 사람이 전염병 환자였다는 이유로 화장장 일대에는 소독약이 뿌려졌고, 화장장 외곽은 20여 명의 군인들이 출입을 봉쇄했다. 유골은 류위안(劉源)이라는 군인이 인수해 갔다. 류위안은 국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역임한 류샤오치(劉少奇)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화장장에는 유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도, 조화 한 송이도 없었다. 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전 세계를 향해 “오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됐다”고 외칠 때 바로 옆에 서 있었고, 1959년 4월 마오가 경제정책의 실패로 국가주석직을 내려놓았을 때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주석에 올랐던 2인자 류샤오치 유해의 비참한 화장 광경이었다.

1898년생인 류샤오치는 마오보다 다섯 살 아래인 후난(湖南)성 고향 후배였다. 국내파인 마오쩌둥과는 달리 23세 때인 1921년 소련 모스크바 동방공산주의 노동대학에 유학했고, 그해 7월 상하이(上海)에서 창당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중국 지하로 잠입해 주로 노동자 파업을 주도했고, 1927년 29세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에 당선된 초기 공산주의자였다. 류샤오치는 공산주의 이론을 제대로 배운 일도 없는 마오쩌둥과 달리 극좌 모험주의와 지나친 좌경화에는 반대하는 성향의 공산주의자였지만,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에서 개최된 준이(遵義)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당의 최고지도자로 당권을 장악하는 데 동의해 마오의 제1 측근이 됐다. 이후 옌안(延安)까지 2만5000km의 대장정에 참가해 마오쩌둥과 함께 걸었고,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꺾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는 데 제1 공신으로 인정됐다. 정부 수립 후에는 주로 경제 건설과 체제 정비를 하는 데 마오를 도와 공화국의 제2 창건자 자리를 굳혔다.

 

마오쩌둥(왼쪽)이 류사오치(가운데)와 함께 자동차 공장을 시찰하고 있는 모습 ⓒ ITAR-TASS

 

마오의 연이은 실책과 무리수

그랬던 류샤오치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은 1958년 자연과학과 수학에 어두운 마오가 ‘대약진(大躍進)운동’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 시작됐다. 마오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곧 이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1894년 청일전쟁 패배 후 잃고 있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후 그는 “7년 이내에 19세기 최강국인 영국의 강철 생산량을 따라잡고, 10년 안에 20세기 최강국인 미국 경제를 따라잡는다”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인민이라는 군중 역량을 바탕으로 크게 약진하자”는 대약진운동은 농촌의 과도한 인력 차출, 급격한 도시 인구 증가와 생필품 공급 부족, 상대적으로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저하와 소련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경제원조 중단 등으로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낳았다.

불과 3년간의 대약진운동으로 중국 경제가 위기 국면으로 빠져들자, 1961년 5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당면한 경제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기 위한 공작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가 40년 고향 선후배 사이인 마오와 류샤오치를 최대의 정적(政敵) 으로 바꿔놓았다. 이 회의에 앞서 류샤오치는 고향인 후난성 농촌으로 가서 44일간의 현장 실사를 하고 온 마당이었다. 류샤오치는 회의석상에서 이런 구두보고를 했다.

“최근 몇 년간 발생한 문제는 도대체 천재(天災)인가, 아니면 우리 당이 실수를 한 인재(人災)인가에 대해 농민들에게 물어봤다. 후난성 농민들은 대체로 ‘3할은 천재요, 7할은 인재’라고 하더라.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허난(河南) 농민들도 대체로 같은 반응이었다. 현재 공화국 인민들은 먹을 것도 부족하고 입을 것도 부족하다. 왜 부족한가? 1959년부터 올해까지 3년째 농업생산은 계속 위축돼 왔고, 공업생산도 40%나 줄어들었다. 내년에도 이 추세를 벗어나 반등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우리는 최근 2~3년간 대약진운동을 해 왔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약진한 것은 없고 퇴보만 계속하고 있다. 거기에다 최근 3년간 자연재해가 겹쳐 농업과 공업 생산이 크게 위축됐다. 우리 당은 결점을 안고 있는 가운데, 착오까지 반복해 왔다. 우리는 냉정하게 판단하고 최근 몇 년간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아내야 한다.”


1978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된 류사오치

류샤오치의 논리적인 연설은 마오가 당시에 추진하던 ‘사회주의 총 노선, 대약진운동, 인민공사화의 3면 홍기 전략’의 기초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마오는 국가주석직을 내놓고 2선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빠졌다. 그런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마오가 내연의 처 장칭(江靑)과 장칭의 측근 3명을 포함한 이른바 4인방을 배후 조종해 조직한 정치투쟁이 ‘문화대혁명’이었다. 대륙 전역의 중·고생과 대학생들을 ‘홍위병(紅衛兵)’이라는 이름으로 동원한 뒤, ‘정신상태가 불순한 지도층 인사’들을 직접 구타하고 때려서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광풍(狂風)을 불게 한 것이었다. 광풍 속에서 마오는 ‘나의 한 장의 대자보(大字報)’라는 글을 발표했다. 바로 류샤오치에 대한 공격이었다.

“류샤오치를 우두머리로 하는 자산계급 사령부는 반동적인 자산계급의 입장에서 자산계급 독재를 실시하려 기도하고 있다. 우리 무산계급들은 문화대혁명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3면 홍기를 부정하는 지도층 위선자들을 척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마오의 ‘나의 대자보’라는 글이 발표되자 홍위병들은 “류샤오치는 마오 주석에게 머리를 조아려 죄를 인정해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홍위병들은 마오에 이어 국가주석에 올랐던 2인자 류샤오치를 거리로 끌어내 류샤오치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겨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는 황급히 허리를 굽혀 모자를 주워 다시 남편에게 씌워주려 했다. 그러자 홍위병들은 “자산계급 황제 보호파 왕광메이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린 홍위병들 앞에서 왕광메이는 “류 주석께서 감기가 심하시다”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결국 류샤오치는 베이징(北京)을 떠나 지방 소도시에 가택연금 당하게 됐고, 홍위병들에게 체포될 때 걸려 있던 심한 감기는 폐렴으로 발전해 고열과 혼수상태를 겪다가 1969년 11월12일 심장이 정지됐다.

산업혁명을 선도해 세계 최고의 강철 생산량을 자랑하던 영국을 7년 이내에 따라잡겠다는 무리수로 농업과 공업을 동시에 위축시켜 약 4000만 명의 아사자를 낸 마오에게 현장 실사를 통한 위기 해결책을 제시했다가 최후를 맞은 류샤오치는 1978년 같은 현실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잡은 뒤에야 복권이 이뤄져 명예를 회복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