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는 왜 덩샤오핑을 죽이지 않았을까?
  •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2.01 08:00
  • 호수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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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진짜 중국 이야기] 중국 주자파(走資派) 연구(1)

1965년 1월14일 중국공산당 정치국은 정국 현안들에 관한 당의 입장을 정리하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은 정치국원들조차 처음 듣는 용어를 구사하면서 흥분한 듯 연설을 시작했다.

“1949년(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10여 년 동안 우리 당이 벌여온 운동에 대해 중점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당내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들을 정리하고 도시와 농촌의 사회주의 진지를 공고하게 발전시키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당내에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들은 막전(幕前)에도 있고, 막후(幕後)에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있고, 보이는 곳에도 있습니다. 이들 당권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도 있고, 보이는 곳에도 있습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당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자본주의의 길을 가려 하는 수정주의자인 주자파(走資派)들을 전면적으로 숙청하자고 한 데서 출발했다. ⓒ CAMERA PRESS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당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자본주의의 길을 가려 하는 수정주의자인 주자파(走資派)들을 전면적으로 숙청하자고 한 데서 출발했다. ⓒ CAMERA PRESS

‘주자파’ 주창, 마오의 정치적 노림수

마오의 연설 가운데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들’이란 말은 마오가 처음으로 내세운 개념이었다. 마오의 이날 연설은 7년 전인 1958년 5월 마오가 19세기의 세계 최강 영국의 강철 생산량을 3년 만에 따라잡겠다는 무리한 목표를 세우고 시작한 ‘대약진운동’이 1년 남짓 만에 펑더화이(彭德懷)를 필두로 한 당내 비판에 부딪힌 뒤 마오의 정치적 권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던 때 나왔다. 

마오는 울며 겨자 먹기로 1960년 겨울부터 1964년 말까지 당 중앙이 제시한 경제발전 조정안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안의 내용은 무리한 강철 생산 계획 포기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원칙을 적용한 집단농장화를 실천에 옮긴 인민공사 프로그램을 축소해 경제발전 속도를 신속하게 회복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마오가 돌연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들’, 줄여서 ‘주자파(走資派)’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연설을 하고 나섰으니, 당내 분위기는 겨울 태풍이 몰아치는 날씨가 되고 말았다.

1965년 11월10일 상하이(上海)에서 발행되는 원후이바오(文匯報)에는 상하이시 당위원회에서 선전을 담당하고 있던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쓴 ‘새로운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는 제목의 연극 비평문이 게재됐다. 해서파관이라는 연극은 현역 베이징(北京)시 부시장인 우한(吳)이 대본을 쓴 작품으로 ‘해서’라는 이름의 명대 청렴관리가 부패한 관료들을 파면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상하이 시당 선전부의 야오원위안은 이 해서파관이라는 연극에 대해 “연극의 극본을 쓴 우한은 현역 베이징시 부시장으로, 베이징시의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독립왕국처럼 운영하고 있다”고 우한 부시장을 정치적으로 공격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야오원위안이 그런 글을 쓴 배후에는 마오의 내연녀 장칭(江靑)과 장칭의 내연남 캉성(康生)의 무시무시한 음모가 있었다. 마오가 정계에서 대약진 실패를 이유로 코너에 몰리자, 장칭이 내연남 캉성과 음모를 짜서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펑전(彭眞) 등 해외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 내부 현실주의자들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고, 세력의 근거를 무너뜨리기 위해 야오원위안을 시켜 베이징(北京)시 당 지도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글을 상하이의 유력지에 게재토록 한 것이었다. 해서파관이라는 연극에 나오는 해서라는 명대 관리가 부패 관리들을 처벌한다는 이유로 내부의 이의제기를 허용하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해서파관의 극본을 쓴 베이징시 부시장이 해서를 미화했다는 것이 야오원위안이 쓴 글의 요지였다. 

이런 사실은 주로 당의 비밀공작을 하던 캉성을 통해 마오에게 보고됐고, 마오는 자신이 빠져 있는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묘안으로 활용하게 된다. 마오는 상하이의 한 신문에서 시작한 논쟁에 불을 붙여 “모든 이의 제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말을 만들어내 전국의 중·고생과 대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학교를 벗어나 거리로 뛰쳐나온 홍위병들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마오의 시 구절 같은 정치구호에 맹목적으로 빠져들어 중국공산당의 기성체제(establishment)를 이루는 당 간부와 지식인들, 문화예술계의 권위자들 집으로 몰려가서 구타하고, 짚으로 만든 고깔모자를 씌워 거리로 끌고 다니고,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광란의 파티를 전국적으로 벌였다. 


“모든 이의 제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홍위병들이 찾아가서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고, 고깔을 씌워 끌고 다니면서 창피를 주고 한 인물들이 베이징시 당서기 펑전, 당 중앙 판공청 주임 양상쿤(楊尙昆), 국무원 부총리 겸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뤄루이칭(羅瑞卿), 당 중앙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 등 이른바 주자파들이었다는 점이다. 주자파의 제1호 인물 류샤오치와 제2호 저우언라이(周恩來), 제3호 덩샤오핑(鄧小平) 등은 뜻밖에도 홍위병들의 미친 파도가 몰아치기 전에 각각 지방으로 귀양 보내지거나, 저우언라이처럼 마오 자신의 품속에서 보호를 받는 복잡한 조치의 대상이 된다. 

저우언라이가 프랑스 유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경제발전에 대해 현실적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오가 끌어안고 보호하고, 저우언라이의 프랑스 유학파 동생으로 나중에 개혁·개방 정책의 설계사가 돼 현재의 중국에 빠른 경제발전을 가져다준 덩샤오핑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고 장시(江西)성 시골 트랙터 공장으로 귀양 보내 3년간 트랙터 부속품 나사를 깎게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아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오가 1976년 9월9일 사망한 뒤에 권력을 잡은 것은 주자파 3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덩샤오핑이었다. 주자파 1호인 류샤오치는 지방으로 귀양 보내진 곳에서 폐렴으로 사망했고, 저우언라이는 마오 자신보다 몇 개월 일찍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주자파 3호 인물로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1980년 이탈리아 여기자 올리아나 팔라치와 인터뷰하면서 “천안문의 마오 초상화는 계속 걸어둘 거냐”는 질문에 “그는 인생 후반부에 과오가 있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사람이므로 초상화를 계속 걸어둘 생각”이라고 말하게 되는데, 덩샤오핑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을 살려둔 마오에게 빚을 갚는다는 생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1997년 2월에 주자파로서 중국이 사상 최고의 경제발전을 하는 것까지 보고 세상을 떠났다. 현 당 총서기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역시 주자파의 일원으로 문화혁명 때 고초를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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