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좋은 어른의 조건 묻는 《증인》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2.08 17:00
  • 호수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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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가 배어 있는 영화 《증인》, 한국 사회의 가려진 목소리를 듣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유일한 목격자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소녀 지우(김향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녀의 말이 법정에서 효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인 용의자의 변호를 맡은 순호(정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증인》은 그랬던 순호가 지우를 만나 점차 변화하는 이야기다. 《완득이》(2011)와 《우아한 거짓말》(2013) 등을 통해 소외된 사람들, 우리 사회 한편에 자리한 멍울을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보는 작업을 이어왔던 이한 감독의 신작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는 온기가 배어 있다. 무엇보다 꽤 직접적인 방식으로 ‘좋은 어른의 조건’을 묻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영화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에는 특이점이 있다. 주인공 순호가 사건 용의자 미란(엄혜란)의 변호인이라는 점이다. 법정의 룰로 보자면 목격자 지우에게 유의미한 증언을 받아내야 하는 사람은 검사 희중(이규형)이다. 순호의 입장은 반대다. 지우의 증언이 효력이 없음을, 혹은 위증임을 밝혀야 한다. 이 경우 영화가 보통 선택하는 주인공은 희중이다. 증인과의 교감을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밝히고 정의를 수호하는 과정 자체가 드라마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증인》의 한 장면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증인》의 한 장면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사회 안에서 가려진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물론 《증인》은 어느 시점까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흘러간다. 사건이 일어난 날 밤의 양상도 또렷하지 않은 묘사로 극 초반에 살짝 제시될 뿐이다. 다만 순호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이 영화가 얻은 효과들은 분명하다. 지우의 주장이 옳다는 걸 받아들이기 위해선, 순호는 변호인으로서 용기를 내야 한다. 어쩌면 자신의 의뢰인이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용기 말이다. 즉 《증인》은 정의가 나의 쪽이 아니라 반대쪽에 있을 때, 그것을 기꺼이 택할 수 있는지를 묻는 서사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리고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려 한다. 거기에 혹시 여전히 배제되는 목소리들이 있진 않은지, 가려진 진실이 있진 않은지.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다음 문제는 ‘어떻게’다. 세상에는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입장이 있다. 그중 어떤 것은 극 중 지우의 입장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심한 경우 처음부터 아예 틀린 것으로 간주된다. 《증인》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소녀를 유일한 목격자로 내세우는 건 그래서다. 지우의 캐릭터는 사회적으로 배제, 더욱 정확하게는 격리되다시피 하는 장애인들의 인권 역시 이야기한다. 더 넓게는 사회 안에서 ‘가려진 목소리’ 전체를 대변한다. 영화는 그것에 귀 기울이려는 태도가, 보다 폭넓은 관용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증인》은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묘사하는 데도 신중하다. 지우가 바라보는 세상 그대로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다. 카메라는 특정 장면에서 청각이 예민하게 발달해 ‘나비의 날갯짓도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로 들리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지우의 시점이 된다. 지우의 세상이 그가 겪는 ‘감각’으로 표현된다는 점은, 기존에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들과 차별화된 전달법이다.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관객은 이를 통해 지우의 세계를 보다 또렷하게 이해하게 된다.

순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가 인간성을 회복하는 서사로도 볼 수 있다. 과거 인권 변호사로 일하며 억울한 이들을 대변하던 순호는 잘나가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됐다. 파킨슨병에 걸린 홀아버지, 갚아 나가야 할 빚이 순호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 이 재판만 잘 넘기면 변호사로서의 인생은 승승장구다. 그러나 지우의 존재는 순호가 나아가는 데 제동을 건다. 지우와 가까워지고 그와 소통하는 법을 배워 나가면서, 순호는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지우의 말에 대답하길 망설인다. 

바로 그 질문을 통해 《증인》은 다음 세대를 위한 기성세대의 태도를 묻는 영화가 된다. 지우는 극 중 그가 하는 말마따나 “변호사는 될 수 없지만 증인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를 법정에 세우는 것만으로도 인물들의 세상은 정의의 편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다. 이 영화가 말하는 ‘좋은 어른’의 조건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소신 있게 나아가는 것이다. 영화는 그것이 신념이고 정의라고 말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기성세대의 태도를 묻다

영화에는 광화문광장의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극의 흐름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순호가 지나치는 광장은 자연스럽게 그곳이 지닌 사회적 함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재판을 진행할 순 없지만 증인이 될 수 있는 지우의 입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뜨거웠던 촛불의 투쟁 이후 우리가 가지게 된 증인의 자격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켜보라고, 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사실 법정 드라마로서의 쾌감이 아주 큰 영화는 아니다. 그보다는 인물들이 관계 맺어가는 방식이,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그려가는 데 중요하게 방점이 찍혀 있다. 배우 정우성의 행보가 한층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도 있다. 알다시피 최근의 그는 영화 밖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옳다고 믿는 사회적 사안에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배우 개인의 관점이 그에 부합하는 캐릭터를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내며 울림을 주는가. 《증인》은 그에 대한 기분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영화 《완득이》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완득이》 ⓒ CJ 엔터테인먼트

한국영화, ‘어른’을 이야기하다

이한 감독의 전작 《완득이》(2011)는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장애인 아버지, 다문화가정이라는 배경 안에서 충돌하는 청소년 완득이(유아인)와 그를 보듬는 교사 동주(김윤석)의 서사다. 어른이 가져야 할 품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실화 소재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도가니》(2011)는 사회 전반의 폭력에 눈감지 않는 자세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피가 끓어오르는 분노 후에 일상의 각성을 충고하는 이 영화는, 지켜야 할 대상과 신념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른이 꼭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바른길로 인도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함께 성장하며 나아가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시선도 있다. 《어른도감》(2017)은 얼렁뚱땅 함께 살게 된 삼촌과 조카의 이야기를 통해, 몸만 커버린 존재가 아니라 ‘진짜 어른’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성장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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