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가 돌아가셔도 휴가 없다는 ‘대기업’
  • 김민주 인턴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2.13 14:5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내 10대 대기업의 절반, 조부모 경조사 처우에 친가·외가 차등 둬
“대기업들,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관행 갖고 있어”

LG전자는 직원의 친조부모 경조사 때 3일 휴가와 경조사비로 월급 절반을 지원한다. 반면 외조부모 경조사의 경우 휴가나 지원금이 없다. 아버지 혈통에 기반을 둔 호주제가 14년 전 폐지됐음에도 여전히 가부장적 인식이 남아 있는 셈이다. 성차별적 요소란 지적도 뒤따른다. 이는 비단 LG전자만의 상황은 아니다. 

시사저널은 지난해 매출액 기준 상위 1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부모 경조사에 따른 휴무일과 경조사비가 어떻게 규정돼있는지 살펴봤다. 그 결과, 답변을 받은 9곳 중 5곳이 외가에 불리한 규정을 두고 있었다. SK홀딩스는 “사내 규정이 대외비”란 이유로 답변을 거부했다.

LG전자는 차등 지급 이유에 “경조사 제도를 조부모 대상으로 확대할 때 한국 기업들의 당시 상황과 사회 분위기 등을 감안했다”고 했다. 회사 홍보팀 관계자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는 점을 감안해 외조부모의 경우에도 지원하는 것을 고민해 왔다”며 “현재 확대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중”이라고 했다. 

ⓒ 양선영 디자이너
ⓒ 양선영 디자이너

10대 기업에 남아있는 가부장적 규정

현대차와 현대모비스는 친조부모 경조사 때 5일 휴가를 준다. 외조부모의 경우 2일이다. 경조사비 지원은 둘 다 없다. 같은 현대차그룹 소속인 기아차는 휴가 규정이 똑같다. 단 친조부모의 경우 연차에 따라 경조사비 10~30만원을 주고, 외조부모에 대한 지원금은 없다. 

현대차그룹 홍보팀 한 관계자는 “사내 규정은 회사와 노조 간 단체협상으로 정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현대차 노조 관계자는 “처음 회사가 규정한 데 따라 특별한 문제제기 없이 진행돼왔던 것 같다”며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 다음 단체협약 때 성평등이 현장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포스코가 주는 경조사 휴가는 친조부모 쪽 3일, 외조부모 쪽 2일이다. 경조사비는 친조부모의 경우 30만원을 주고, 외조부모의 경우 없다. 포스코 그룹 측은 “외조부모 쪽 경조휴가는 2016년 4월부터 이틀로 개선됐다"고 말했다. 그 외 삼성전자, 삼성생명, (주)한화, GS칼텍스 등 10대 기업은 경조사 관련 처우에 있어 친가·외가에 따른 차이가 없었다. 

 

관련 법안은 2년 가까이 계류 중

국가인권위원회는 기업의 경조사 관련 처우에 대해 2013년 “외조부모를 차등 대우하는 것은 경영상 재량의 범위를 넘어 특정 집단을 배제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것”이라며 “차별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인권위는 시정을 요구하는 ‘권고’가 아닌, 노사합의를 거쳐 자체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표명’을 했다. 그러나 5년이 넘도록 기업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셈이다. 한필훈 인권위 성차별시정팀 조사관은 “1년에 한 건씩 경조사 처우 차등을 수정해달라는 진정이 들어온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7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인권위의 의견표명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기업이 여전히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앞서 2017년 5월 박경미 민주당 의원도 동일한 내용의 법안을 내놓으면서 “경조사가 시장 영역에 맡겨져 있는 이상 차별적 상황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은 요원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 법안 모두 처리가 미뤄지고 있는 상태다.

2018년 10월25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58 LG 생활건강이 들어서 있는 LG 광화문 빌딩 앞 광장에 노조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화단이 설치되어 있다. ⓒ 최준필 기자
2018년 10월25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58 LG 생활건강이 들어서 있는 LG 광화문 빌딩 앞 광장에 노조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화단이 설치되어 있다. ⓒ 최준필 기자

 

“차등적 사내 규정 결코 사소하지 않아”

전문가는 “차등적 사내 규정은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명선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특임교수는 2월12일 “친조부모에 휴가를 더 주는 건 친가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라며 “기업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서 가야 하는데, 여태 시대착오적이고 문화지체적인 관행들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공기업은 조부모 경조사에 대한 처우에 있어 친가·외가 구분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매출액 상위 6곳의 공기업은 조부모 경조사에 따른 휴무일이 2일이나 3일로 동일했다. 

박혜수 기획재정부 공공제도기획과 서기관은 “공기업을 포함한 공공기관은 공무원 규정을 참조해서 자체 규정을 만들기 때문에 차등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현행법상 국가공무원은 조부모의 경조사 휴가를 3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엔 친가·외가 구분이 없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