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신화④] 孫의 8할은 아버지, 2할은 반 니스텔루이
  • 기영노 스포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2.15 16:58
  • 호수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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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한민국 ‘축구의 미래’ 손흥민을 만들었나
88 올림픽 대표팀 출신인 아버지 손웅정씨의 ‘축구 올인’ 작전 주효

손흥민 선수가 속해 있는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훗스퍼의 디니엘 레비 회장이 지난해 9월10일 미국 스포츠 네트워크 기고문에서 우리 유소년팀을 위해 “손흥민의 아버지(손웅정)를 코치로 영입해야 한다”고 썼다. 레비 회장이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씨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의 글을 기고한 것으로 보인다.

프로축구 선수 출신인 손웅정씨는 척박한 한국 축구계의 현실을 감안한 ‘축구 올인’ 작전으로 아들을 국내를 넘어 세계 정상권 선수로 키워냈다.

손씨는 1962년생으로,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오로지 축구 때문에 서산에서 춘천으로 갔고, 춘천고에 다닐 때만 해도 공격수로서 스피드는 있었지만 키(167cm)가 작아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명지대에 진학하면서 스피드에 기술까지 얹어져 대학 최고의 공격수로 자리를 잡으면서 대학축구를 평정했다. 명지대를 나와 상무를 거쳐 프로축구 현대 호랑이에 입단, 첫해에 5골을 넣으면서 23세 이하 국가대표팀에 선발됐지만, 큰 부상을 당해 더 이상 기량이 늘지 않았다. 

1988 서울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된 손씨는 당시 박종환 감독의 눈에 띄어 천마 일화로 옮겼다. 그 후 2년 동안 주로 교체 멤버로 활약하다가 끝내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28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그라운드를 떠났는데, 프로선수로 37경기에서 7골을 넣은 게 전부였다. 손씨는 은퇴 후 국내에 안착하지 않고 스페인·브라질·독일 등 축구 선진국들의 유소년 시스템을 경험한 후 국내로 돌아와 유소년 전담 코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춘천시 공지천에 있는 축구장에서 춘천 FC 유소년팀의 감독을 맡아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성과가 나타나자 춘천시의 후원을 받아 ‘SON 축구 아카데미’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유소년 축구선수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왼쪽부터)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씨, 손흥민, 뤼트 반 니스텔루이 ⓒ 연합뉴스·PA Images·EPA 연합
(왼쪽부터)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씨, 손흥민, 뤼트 반 니스텔루이 ⓒ 연합뉴스·PA Images·EPA 연합

“아버지의 헌신적 뒷받침 없었다면 이 자리 없었을 것”

손씨가 둘째 아들 손흥민을 집중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손흥민보다 7살 많은 첫째 아들 손흥윤(SON 축구아카데미 코치)이 큰 부상을 당해 축구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손씨는 아들 손흥민이 (부안)초등학교, 후평중학교(육민관중학교)를 다닐 때도 팀의 승리와 패배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도록 했고, 기본기를 익히면서 축구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축구의 기본기에는 볼 컨트롤과 패스, 드리블이 있고 마지막에 가서 슈팅훈련을 한다. 손흥민의 100m 기록이 11초대 후반인데, 공을 몰고 드리블하는 속도도 12초대 초반에 이를 정도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그만큼 기본기가 잘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슈팅 수에 비해 골 확률이 높은 것도 기본기가 완벽하기 때문이다. 손흥민이 슈팅을 할 때 보면, 국내나 대부분의 유럽선수들보다 15~20도 정도 허리를 더 숙인다. 자연히 공이 뜨지 않고 골대를 향하게 된다. 

손흥민이 이회택·홍명보 등 걸출한 선수들을 배출한 축구 명문 동북고를 입학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중퇴하고, 분데스리가 함부르크 유소년팀으로 간 것은 아버지 손웅정씨의 결단 때문이었다. 손씨는 아들이 축구로 성공하기 위해 스펙을 쌓느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선진축구를 직접 접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

결과적으로 손씨의 판단이 옳았다. 손흥민은 함부르크 유소년 SV 유스팀에 1년간 유학하고 돌아와 고 이광종 감독이 이끄는 ‘17세 이하 피파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동북고는 손흥민을 제적시키지 않고 학적이 유지되도록 했다.

동북고는 손흥민이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할 때 국제축구연맹, 즉 FIFA 규정에 따라 선수를 영입하는 구단은 그 선수를 만 12세부터 23세까지 길러준 해당 클럽이나 학교에 이적료의 ‘5퍼센트’를 주는 ‘연대기여금’ 혜택을 받아 1억원을 받기도 했다.

손흥민은 “아버지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항상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손웅정씨가 아무리 아들 손흥민을 위한다 하더라도 팀 내에서 일어나는 디테일한 것까지 챙길 수는 없다. 더구나 말도 통하지 않고, 축구 문화도 다른 외국팀에서의 적응 여부는 축구인생이 걸려 있을 만큼 중요하다.


어린 손흥민에게 손 내민 세계적 공격수 반니

손흥민이 2010년 분데스리가 함부르크 SV팀에 입단했을 때 브라질의 호나우두, 프랑스의 티에리 앙리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바티스투타와 함께 ‘세계 4대 공격수’라고 불리던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의 주 공격수이자 함부르크의 에이스 뤼트 반 니스텔루이(반니) 선수가 있었다. 반니는 손흥민과 같은 포지션인 중앙공격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한 팀에서만 219경기에서 150골을 넣었고, 프리미어(영국), 에레디비시(네덜란드), 프리메라(스페인)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득점왕을 지낸 전설적인 선수다.

그런데 손흥민이 함부르크 1군에 합류해 훈련을 시작하던 첫날, 반니 선수가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하면서 환영해 줬고, 그 후 두 사람은 네덜란드와 한국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면서 동료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팀에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그렇지 않아도 손흥민은 자신과 같은 포지션인 반니의 ‘스피드를 이용한 화려한 드리블’ 등의 플레이를 보면서 ‘멘토’로 삼고 있었다.

손흥민은 “처음에 이곳(함부르크)에 왔을 때는 독일어는 물론 영어도 못 했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반니’가 리드를 잘해 주는 바람에 팀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도 첫 훈련이 끝난 후 ‘넌 좋은 선수야’라고 말 한 것이 결정적으로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반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박지성 선수와 ‘한국 식당’을 함께 다닐 정도로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같은 한국 선수인 어린 손흥민에게 애정이 갔었다고 한다. 

반니는 2011년 시즌 직후 함부르크를 떠나 프리메라리가 ‘말라가 CF’로 가면서도 손흥민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당시 함부르크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손흥민과는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을 것이다. 그는 언제든지 나에게 전화해도 된다. 나도 연락할 것”이라며 손흥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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