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엽종 보이차로 유명한 의방(倚邦)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2.16 10:00
  • 호수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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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Tea Road] 청나라 초기부터 소엽종으로 보이차 제조

쓸쓸함이 넉넉했다. 정적을 깨고 남정네들이 장작을 패는 소리만 의방(倚邦) 옛 거리를 울리고 있었다.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의방은 여전히 한적한 산골마을이었다. 청나라 시절 의방 일대는 19개 자연부락의 인구가 9만 명이 넘었다. 차를 사고파는 봄철에는 외지에서 온 상인과 노동 인력까지 가세해 20만 명이 의방차산을 누비고 다녔다 한다. 현재는 의방을 포함한 13개 마을을 다 합쳐도 214가구에 936명이 살고 있다. 

의방은 명나라 말기부터 석병(石屛)의 한족과 초웅(楚雄)에 거주하던 이족(彛族)이 집단이주해 차 산업을 일으켰다. 청나라 초기에 사천성(四川省) 농부들이 유입되면서 사천에서 가져온 소엽종(小葉種) 차나무를 대량 증식시켰다. 소엽종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를 청나라 황실에 공차로 보내고, 전설적인 유명 차창에서 소엽종으로 보이차를 만들던 의방은 고(古) 6대 차산 가운데서도 해발고도가 제일 높은 곳이다. 해발 1950m에서 채취한 소엽종 찻잎을 우리면 쓴맛은 적고 부드러운 단맛이 올라온다.  

소엽종 차나무의 새싹은 중국 현지에서 고양이 귀라고도 불린다.
소엽종 차나무의 새싹은 중국 현지에서 고양이 귀라고도 불린다.

소엽종 보이차, 정부의 보이차 개념과 상충

의방에서 만들어온 소엽종 보이차는 2008년 중국 정부가 정한 보이차 개념과 상충된다. 운남성 표준계량국이 정의한 보이차는 ‘운남 지역 대엽종 차나무 잎을 쇄청한 원료로 만든 생차(生茶)와 숙차(熟茶)’지만, 대엽종이 아닌 소엽종으로 만든 보이차가 청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엽종 보이차는 중국 정부가 공표한 보이차 정의에 맞지 않다는 논란이 가열되면서 소엽종 보이차의 원조인 의방은 오히려 더 유명해졌다. 옛 영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의방을 찾는 외지인이 많이 늘었다. 

의방 가는 길은 크게 두 방향이 있다. 운남성 서쌍판납주의 주도인 경홍시에서 이무(易武)로 가서 상명(象明)을 거치는 길과 기낙(基諾)을 경유하는 방법이다. 새로 조성된 기낙 민속촌도 볼 겸 필자는 기낙 방향으로 갔다. 중국 전체 인구에서 2만 명도 채 안 되는 소수민족 기낙족은 15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미혼남녀의 교제를 위해 마을에서 제공하는 공방(公房)을 사용할 수 있다. 기낙 민속촌은 산허리를 향해 올라가며 기낙족의 조상신과 주거풍속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산등성이를 다듬어 만든 광장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큰 북을 치며 대고무(大鼓舞)를 추고 있었다. 산나물을 곁들인 간단한 식사와 기낙족이 만든 보이차가 공연 중에 제공됐다.   

의방에 햇살이 남아 있을 때 도착하기 위해 민속공연 도중에 산 아래로 내려왔다. 하산 길에도 전통 베틀로 베를 짜는 작업장과 철을 다루는 대장간이 눈길을 끌었다. 발 딛는 부분이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진 대나무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기낙족 청년의 기예가 돋보였다. 불쇼와 민속전시관도 있었지만 산길로 140km를 더 가야 하는 만큼 사륜구동을 타고 의방으로 향했다. 제갈공명이 말 탈 때 발을 끼우는 쇠로 된 발걸이 한 쌍을 묻어두고 갔다는 혁등(革登)차산을 지나 의방에 도착했다. 의방은 제갈공명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남겨뒀다는 설화가 있다. 

의방 일대를 지배했던 태족(傣族)은 의방을 마랍(磨腊)이라 불렀다. 마랍은 ‘차 마을’이란 뜻이다. 360㎢에 달하는 고산지대에 다민족이 어울려 살았던 중심지가 의방의 옛 거리다. 경제와 지역정치의 중심 무대가 된 의방의 부흥은 기낙 지역의 민란 덕분에 이뤄졌다. 1729년(청, 옹정 7년) 기낙에 보이부(普洱府)를 처음 설치한 청나라는 민란과 전염성이 강한 풍토병을 피해 1735년 사모(思茅)로 보이부를 옮기며 유화정책을 썼다. 중앙관리가 아닌 의방의 토착세력을 세습관리로 임명하고 기낙을 통제하도록 했다.   

① 기낙족이 민속촌 산등성이에 모셔놓은 조상신 ② 칼날사다리를 내려온 기낙족 ⓒ 서영수 제공
① 기낙족이 민속촌 산등성이에 모셔놓은 조상신 ② 칼날사다리를 내려온 기낙족 ⓒ 서영수 제공

차나무 살리기 위해 큰 나무 편법 고사

의방 토사(土司)로 임명된 조(曹)씨 가문은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대를 이어 의방의 번영과 몰락을 함께했다. 돈이 넘치던 시절 의방 토사는 관제묘(關帝廟·관우를 모시는 사당)를 만들어 더 많은 재물을 기원하기도 했다. 관우는 중국에서 재물신(財物神)으로 통한다. 관제묘를 중심으로 향우회 성격의 상인조합이 형성됐다. 석병회관을 필두로 사천회관과 초웅회관이 들어서며 출신 지역별로 회관을 만들어 상인들이 단결했다. 토사 집안으로 위세를 떨치던 조씨 가문도 차 산업에 명운을 걸었다.

의방에서 만든 차는 중국을 넘어 티베트와 홍콩, 마카오로 수출됐다. 월남을 거점으로 동남아시아와 유럽에도 보이차가 전해졌다. 의방에 속한 만송(曼松)은 대엽종 차나무와 소엽종 차나무가 혼재한 지역으로 이 둘을 섞어 만든 차가 높은 평가를 받아 만송차를 황실공차로 보냈다. 황실공차는 청나라 조정대신과 외국 사신에게 하사품과 답례품으로 사용됐다. 청나라 말기에는 민란과 치안부재로 차 산지에서 운남성의 성도인 곤명(昆明)까지도 차 운송이 원활하지 않게 됐다. 

의방의 전성기를 가져온 민란은 의방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초웅 지역의 석양은광(石洋銀鑛) 운영권을 놓고 한족과 회족(回族)이 충돌한 사건을 부당하게 처리한 청나라 정부는 1856년 무고한 회교도 4000여 명을 참살한 ‘곤명 대학살’도 수수방관했다. 두문수(杜文秀)와 함께 운남에 거주하는 회족들이 판데(Panthay)의 난을 일으켰다. 청나라에 무시당하던 운남의 다른 소수민족들도 민중봉기에 합류했다. 두문수는 대리(大理)를 점령해 평남국(平南國)을 세워 중국 최초 회교 국가를 선포했다. 

의방에 두문수가 직접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회족과 연합한 소수민족이 의방을 공격해 토호 세력과 상인을 살해하고 차산을 불태웠다. 사흘 밤낮을 휩쓴 화재는 차산을 초토화시켰다. 1867년 곤명 공격에 실패하면서 세력이 꺾인 두문수는 1872년 죽었지만, 민란 와중에 직격탄을 맞은 의방의 차 산업은 이미 풍비박산이 났다. 의방 옛 거리는 퇴락한 건물 앞에 방치된 돌사자만이 옛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는 의방 옛 거리를 벗어나 마을사람과 함께 차산으로 걸어갔다. 밀림 사이로 듬성듬성 서 있는 차나무가 밭에서 재배하는 차나무와는 확연히 구분됐다. 산비탈로 내려서니 공터처럼 황량한 공간에 차나무만 서 있었다. 거목들이 밑동껍질이 벗겨진 채 말라죽고 있었다. 마을사람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어투로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나무 때문에 차나무 일조량이 부족한데, 정부에서 벌목을 못하게 해 편법으로 큰 나무들을 고사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대략난감이었다. 돈 앞에 자연은 여기에서도 우선순위를 양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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