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체질 바꾸기’ 나선 정의선
  • 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mw@sisajournal-e.com)
  • 승인 2019.02.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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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채 폐지, 이메일 보고 활성화 등 변화 시작…순혈주의 깨는 조직적 변화 필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 부회장이 ‘현대차=경직된 조직’이라는 등식을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정 부회장은 최근 현대·기아차 신임 과장 세미나에 영상으로 출연해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영상에서 정 부회장은 자율주행차 넥쏘를 타고 음료수를 마시며 휴대폰을 조작하는 모습을 시연하며 “이 좋은 차를 누가 만들었지?”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 정도 농담이 무슨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기존 현대차그룹 문화와 오너의 경영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에겐 상당한 파격이다. 현대차는 국내 대기업 중에서도 군대식 조직문화, 제왕적 오너 체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곳이다. 마지막까지 제왕적 오너 및 군대식 문화가 남아 있을 기업이 있다면 그곳이 현대차일 것이란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그런 현대차에서 오너가 직접 영상에 등장해 제품을 시연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 사건이다. 

정 부회장이 본격적으로 현대차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그룹 내 문화도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과거 제조업엔 적합하게 여겨졌던 경직된 조직문화가 지금 경영환경에선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현대차의 체질 바꾸기 행보는 향후 정의선 부회장이 그리는 현대차의 미래상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풀이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 부회장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현대차 글로벌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자율주행차 기술 등 미래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 부회장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현대차 글로벌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자율주행차 기술 등 미래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젊은 직원도 문제점 있으면 할 말 한다”

현대차는 최근 커넥티드카 등 미래차 기술 개발은 물론 차량공유 사업과 관련해서도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단순 자동차 제조업체에서 ‘종합자동차서비스그룹’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선 과거 단순생산 제조업에 맞게 형성됐던 문화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다. 즉, 현대차의 변화 노력은 곧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정 부회장도 올해 1월 시무식에서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게임의 룰이 형성되고 있다”며 “지금까지의 성장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역량을 한데 모으고 미래를 향한 행보를 가속화해 새로운 성장을 도모해야 할 때”라고 밝힌 바 있다. 

정 부회장이 체질 바꾸기와 관련해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소통과 유연함이다. 이는 그동안 현대차 조직이 가장 약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지난해 지배구조 개편이 무산됐을 때도 그는 “더욱 폭넓게 소통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보고 문화다. 현대차 관계자는 “정의선 수석 부회장 체제가 확립된 이후 그에게 직접 이메일로 보고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과거 현대차에서 오너에게 보고가 올라가는 과정은 팀장-실장-사업부장 등을 거쳐 마지막에 본부장이 오너에게 대면으로 보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때문에 과장 등 아래 직급부터 윗선까지 해당 내용이 모두 취합돼 보고되기까진 한 달여가 소요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부회장에게 이메일로 보고하는 경우가 늘었다. 사안에 따라선 실장급이 직접 이메일 보고하는 것도 가능하다. 형식을 파괴한 보고체계 간소화를 통해 좀 더 기민한 조직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정의선 부회장이 소통을 중요시하는 문화를 강조하면서 조직 내 젊은 직원들의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한 현대차 직원은 “예전만 해도 젊은 직원이 문제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위에 보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요즘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낀다”며 “바꿔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면 윗사람과 함께 논의하려고 한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그동안 현대차 출신만을 중용하던 ‘순혈주의’ 풍토도 많이 깨지고 있다. BMW의 고성능 모델 M시리즈를 만든 알버트 비어만을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연구개발본부장에 앉힌 상징적 사건 외에, 과장급 이하에서도 활발하게 외부인사 영입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엔 주로 기계과 출신 정통 자동차맨이 많았다면, 지금은 배터리·반도체 등 보다 다양한 분야와 기업에서 경력직을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 공채를 폐지하기로 한 것은 순혈주의 타파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란 분석도 있지만, 빠르고 기민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성격도 짙다. 현대차 관계자는 “상반기와 하반기 공채를 하면 인원 공백이 생겨도 바로 충원을 못 하고 공채 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며 “이젠 조직이 빈자리에 맞는 인재를 딱 맞는 타이밍에 충원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현대차그룹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지만, 현대차가 완전한 소통조직으로 가기 위해선 중간 관리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나오고 있다. 조직에 세월을 바치며 철저히 ‘현대차맨’이 된 임원급 인사들의 협조가 없으면 정 부회장이 이루고자 하는 체질 개선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현대차 직원은 “일부 팀장이나 임원은 여전히 과거와 같이 직원들이 사내 교육을 받으려는 것도 막으며 일을 시키려 하거나, 윗선에 잘 보이기 위해 과잉충성하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직원 입장에선 부딪치며 일할 사람은 결국 정 부회장이 아니라, 팀장이나 임원이기 때문에 그냥 과거처럼 하던 대로 하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전했다. 정 부회장도 이를 의식한 듯 임원급들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과거 임원들은 휴가를 쓴다는 것을 생각도 못 했는데, 정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면서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휴가를 쓰도록 독려했다는 후문이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현대차그룹 사옥 ⓒ 시사저널 최준필
서울 양재동에 있는 현대차그룹 사옥 ⓒ 시사저널 최준필

체질 개선 위해 임원들의 협조 필수

임원들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선 조직체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김필수 자동차연구소장)는 “현대차의 가장 큰 문제는 순혈주의를 바탕으로 한 경직된 조직 구조 및 의사결정 체계인데, 이를 그대로 두면 혁신 시도도 의미가 없게 된다”며 “다양한 부문의 인사들을 융합 배치해 사람들도 문화적으로 섞어주고 서로 크로스체크 할 수 있도록 조직적인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편 일각에선 임원들의 변화가 의외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 재계 인사는 “사실상 계약직인 임원들은 어차피 회사 방향이 정해지면 이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잘 노력해야 할 사람들”이라며 “변화의 방향이 정해졌는데 불협화음을 굳이 만들겠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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