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수 조작, 특별 전형…은행 채용비리 도 넘었다
  • 조해수·유지만 기자 (chs900@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1 17:00
  • 호수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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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과 공소장으로 본 은행 채용비리
시민단체 “청탁자 공개하고 책임자 엄중 처벌해야”

공공기관 채용비리 전수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시중은행의 채용비리 역시 다시 한번 도마에 올랐다. 정부는 2월20일 1205개 기관을 대상으로 한 특별점검 결과 182건의 채용비리를 적발해 36건은 수사 의뢰하고, 146건은 징계·문책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보다 앞서 검찰은 시중은행의 채용비리를 수사한 뒤 4명의 은행장을 포함해 모두 38명을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시사저널은 신한·우리·KEB하나·KB국민은행의 채용비리 공소장과 판결문 및 내부 문건 등을 단독 입수했다. 은행을 관리·감독해야 할 정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과 금융감독원(금감원) 고위 간부들이 불법 채용청탁을 한 정황이 나왔다. 심지어 은행에 대한 정보 수집을 담당했던 국가정보원(국정원)의 고위 간부가 딸의 합격을 청탁하기도 했다. 채용청탁을 받은 은행장 등 시중은행 고위 간부들은 거리낌 없이 점수를 조작했다. 또한 대부분의 은행들이 여성 대신 남성을 더 뽑기 위해 임의대로 합격자를 선정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은 1월10일 고위 공직자의 자녀·친인척을 특혜 채용한 혐의(업무방해)로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이 전 은행장은 금감원과 국정원 고위 간부 등으로부터 입사청탁을 받고, 청탁자의 배경에 따른 우선순위까지 반영한 명부를 별도로 만들어 관리했다. 이 전 은행장의 판결문에는 청탁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왼쪽)함영주 하나은행장, (오른쪽)이광구 전 우리은행장 ⓒ 연합뉴스
(왼쪽)함영주 하나은행장, (오른쪽)이광구 전 우리은행장 ⓒ 연합뉴스

국정원 고위 간부 “내 딸 잘 부탁한다”

이○○는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로 우리은행을 포함한 시중은행에 대한 검사 업무를 총괄했다. 이 부원장보는 “조카 신○○이 우리은행에 지원했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 잘 부탁한다”는 취지로 청탁을 했다. 신씨는 서류전형 미달로 불합격 대상이었으나, 이 은행장이 “(금감원은) 감독기관이라서 유대관계에 있는 것이 좋다. 합격시켜라”면서 신씨의 합격란 부분에 동그라미를 쳤다. 청탁명부를 건네받은 우리은행 인사 담당자는 기존에 합격권 안에 있던 불상자를 탈락시킴과 동시에 신씨를 합격자로 결과를 조작했다.

판결문에는 국정원 고위 간부가 채용청탁을 한 내용도 나와 있다.

백○○은 2015년 9월경부터 2016년 6월경까지 국정원 2차장 산하 7국 경제분석 1처장으로, 8국에 우리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에 대한 정보 수집을 요청하고, 우리은행장 선임에 영향을 미치는 청와대에 보고하는 각종 보고서의 작성을 총괄했다. 백 처장은 “딸 백○○가 우리은행에 지원했다. 학점이 썩 좋지 않으니 잘 부탁한다”는 취지로 부탁했고, 우리은행 측 인사 담당자는 “반드시 합격시켜야 한다”며 백씨에 대한 청탁명부의 비고란에 ‘必(필)’, 서열코드난에 ‘1’로 기재했다. 이 은행장은 백씨가 불합격 대상이라는 보고를 받고, 백씨의 배경을 의식하면서 합격여부 부분에 동그라미를 쳤다. 청탁명부를 건네받은 우리은행 인사 담당자는 기존에 합격권 안에 있던 불상자를 탈락시킴과 동시에 백씨를 합격자로 결과를 조작했다.

은행장 추천은 ‘長’으로 별도 관리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이 은행장은 채용절차의 최종 결재권자로서 이 사건 업무방해 범행을 주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은행장 연임 여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국정원이나 금감원의 고위 간부들의 청탁을 더욱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함영주 KEB하나은행장도 채용비리에 깊숙이 관여했다.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함 은행장이 합격을 지시한 응시자는 ‘長(장)’이라는 표시와 함께 별도 관리됐다.

함 은행장은 지인이자 전 A은행 지점장인 ㅂ○○로부터 “우리 아들이 하나은행에 지원했으니 잘 봐달라”는 취지의 연락을 받게 되자 인사부장 ㄷ○○에게 “잘 살펴보라”고 말했다. 인사 담당자는 하나은행 임원들의 채용 추천을 정리해 관리하는 채용 추천자 리스트에 인적사항, 수험번호 등과 함께 추천자를 ‘長(장)’으로 기재했다. 

합격 지시가 내려온 후에는 공공연하게 점수 조작이 이뤄졌다. 

서류전형에 불합격한 사실을 알게 되자 “리스트에 기재된 지원자들은 서류심사에 탈락했더라도 큰 문제가 없으면 다음 전형을 보게 하라”고 지시했다…합숙면접에 합격시키라는 취지로 지시하고 이에 따라 합숙면접 점수를 61.92점에서 65.42점으로 수정해 합격자 명단에 포함시켰다…임원면접 점수 2점으로 합격자 커트라인 3.2점에 미달함에도 불구하고 합격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심지어 없던 전형을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인·적성검사에 합격시키기 위해 “해외대학 출신들을 따로 추리고 그 그룹 안에서 합격자를 따로 선정하라”는 취지로 당초 채용계획 및 채용공고에 없던 경쟁그룹을 별도로 만들 것을 지시했다. 위 별도의 경쟁그룹에서조차 인·적성검사 결과가 30명 중 23위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합격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성차별(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위반)은 대부분의 은행 채용비리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다음은 KB국민은행의 채용비리 판결문이다.

‘신입행원 최종 합격자의 남성과 여성 비율을 6:4나 7:3으로 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받아 그러한 지시를 이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특별한 기준 없이 지원자 117명(남성은 113명)을 지정해 그들에 대해 서류전형 평가 심사위원들이 최초 부여한 자기소개서의 평가등급을 임의로 상향하여 합격시키고, 지원자 119명(여성은 112명)에 대해 서류전형 평가 심사위원들이 최초 부여한 자기소개서의 평가등급을 임의로 하향해 불합격시키도록 지시했다.

법원 “은행은 일반 사기업과 다르다”

채용비리와 관련해 재판을 받고 있는 은행들은 ‘사기업’인 것을 강조하면서 “자유로운 인재상을 추구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법원은 “은행이 다른 일반적인 사기업과는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즉, 은행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기업이기는 하나, 다른 사기업과 달리 은행법에 의해 금감원의 감독을 받고, 특히 은행이 부실화될 경우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등 각종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채용비리로 재판 중이거나 불법 청탁을 한 인물들이 징계는커녕 뻔뻔하게 연임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각 은행에서는 경영실적이 좋아서 연임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돈만 많이 벌면 무슨 짓이라도 해도 좋다면, 성적 올리려고 커닝을 해도 무방하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연임 논의를 즉각 중단하고 오히려 징계 절차를 밟아야 한다. 관련자들을 철저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행 불법 채용청탁에 대한 수사 결과 국회, 국가정보원, 금융감독원 등 ‘힘 있는’기관 인사들이 다수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 시사저널 이종현
은행 불법 채용청탁에 대한 수사 결과 국회, 국가정보원, 금융감독원 등 ‘힘 있는’기관 인사들이 다수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 시사저널 이종현

“은행 채용비리 청탁자 명단 즉각 공개하라” 

금융정의연대, 논평 통해 “청탁자 중 공직자만이라도 공개해야”

시사저널은 지난 2월13일, 국회 정무위원이었던 정우택·김재경 의원(이상 자유한국당)과 김영주 의원(더불어민주당), 그리고 권혁세 전 금융감독원(금감원) 원장 등 금감원 고위 간부가 신한은행에 불법 채용을 청탁한 사실을 보도했다. 

금융정의연대(대표 김득의)는 지난 2월20일 논평을 통해 “청탁자 명단 공개에 금감원과 국회가 소극적인 이유가 청탁자를 비호하기 위함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금융권 채용청탁이 만연한 상황에서 금융 당국마저 비리입사자 채용 무효와 피해자 구제 등 사후조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이러한 의혹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라면서 “이런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즉각 청탁자 명단을 낱낱이 공개해야 하며, 개인정보보호법 등으로 인해 공개에 한계가 있다면 최소한 공직자에 한해서라도 청탁자 명단을 공개해 사회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정의연대는 관련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논평에 따르면 “채용비리 사건은 수많은 청년들을 좌절하게 했다. 그 재발을 막고, 무너진 윤리의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관련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사후조치를 취해야 한다”면서 “나아가 금융 당국은 재판을 이유로 채용비리 관련자의 징계를 미뤄서는 안 된다. 만약 제대로 된 사후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중에 발각되어 처벌을 받을지언정 자식, 친지는 입사시키는 지독한 행태가 반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은행, KEB하나은행, KB국민은행 등 채용비리 관련 시중은행들이 제도와 입법 미비 탓을 하며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부정합격자를 조사해 퇴사 조치하고, 피해자를 즉각 구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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