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후정 인터뷰]② “남녀차별금지법 왜 폐지했나”
  • 구민주 기자 · 정리=이준엽 인턴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6 11:00
  • 호수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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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⑨
윤후정 초대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인터뷰(中)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앞선 (上)편 [윤후정 인터뷰]① “‘여성은 원래 그래야만 한다’는 건 없다” 기사에 이어 계속됩니다. 

윤후정 전 이화여대 명예총장이 그나마 정치권에 가장 가까이 머무른 건 바로 1998년 김대중 정부 당시 대통령 직속 여성특위 초대 위원장을 맡게 됐을 때다. 전례 없는 열악한 조직을 갑작스레 떠안게 된 그는 직접 정부 부처를 뛰어다니며 예산을 늘리고 권한을 따냈다. 그 과정에서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응원과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여느 조직의 한 달 예산도 안 되는 1년 예산을 갖고도 윤 전 총장은 차곡차곡 여성특위의 존재감을 쌓아 나갔다. 남녀차별신고센터 개소, 여성 실업 실태 파악, 대중매체 성차별 개선 권고 등 당시 여성특위에선 현재까지 이어지는 활동들을 앞서 실행했다.

여성특위원장 임명은 당시에도 파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특위를 맡게 되셨나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1998년 2월말, 정부 소속의 한 직원이 찾아와 3월2일 유엔 총회가 있는데, 대통령께서 나보고 거길 가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가서 뭘 하는지, 뭘 준비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가면 총회에서 다 준비할 테지 그냥 가시면 된대요. 당황스러웠죠. 갔더니 준비는 무슨 준비예요. 4년에 한 번 각 나라에서 여성 정책의 현황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는데, 하나도 준비가 안 된 상태였어요. 밤새 부랴부랴 준비해 천만다행으로 잘 끝마쳤어요. 그러더니 곧장 신낙균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날 찾아와 여성특위원장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안 한다고 하고 귀국했는데 이미 내가 하는 걸로 공고가 알려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하게 됐죠.”

1955년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뽑혀 답사하는 모습 ⓒ 이화학당 제공
1955년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뽑혀 답사하는 모습 ⓒ 이화학당 제공

“남녀차별금지법 폐지, 여성 의원들에 속상”

처음엔 예산도 적고 여러모로 업무를 펼치기에 한계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첫 출근을 하니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 나 혼자 떵하니 있더라고요. 비서 한 명 없이. 그래서 그때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뽑기 시작했어요. 직원 40명이 일하는 부서인데 1년 예산이 20억원이었어요. 그거 갖고 무슨 행정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예산청장을 찾아가 2시간을 기다려 담판을 지었죠. 20억원이 추가돼 40억원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직원들이 날 많이 신뢰했어요. 내가 가만히 앉아서 명령만 하다가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늘 직접 돌아다니며 일을 해결하니까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지원이 있었나요.

“이희호 여사께서 상당히 협조적이셨어요. 여성특위 시작한 지 두어 달 후 여사께서도 참석한 한 자리에서 내가 특위의 한계를 쭉 나열했어요. 특위가 입법·집행권도 없이 자문만 하는 역할이라면 더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대통령 직속이지만 대통령이 저 멀리 계셔서 만나 뵙기 힘들다고도 했죠. 여사께서 이런 말을 쭉 받아 적으시더라고요. 다음 날 대통령께서 즉각 나를 부르셨어요. 배석한 비서실장에게 내가 요구하는 걸 다 적으라고 시키시더라고요. 그렇게 묵묵히 지원을 많이 해 주셨죠.” 

여성특위의 대표적인 성과가 ‘남녀차별금지법’을 제정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려운 점 많으셨죠.

“그때만 해도 남녀차별에 관한 법률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잘 없었어요. 그렇지만 공공사회에서 남녀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보장토록 하는 아주 중요한 법이었죠. 초안을 만들면서 부처의 동의를 받는 게 참 힘들었어요. 반응도 싸늘하고 반대도 많았어요. 일단 다 남성들이었고. 법에 대한 협조를 얻기 위해 한 여자 국회의원 사무실 앞에서 직원들과 몇 날을 기다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날 보자마자 스무 살은 더 많은 내 손을 휙 뿌리치고 가더라고요. 어쨌든 매우 협조적인 의원 한두 분 덕에 법이 통과될 수 있었어요. 그때 ‘성희롱’에 대한 개념을 처음 법률에 집어넣기도 했죠. 그런데 이 남녀차별금지법이 2005년에 폐지됐잖아요. 참 여성의원들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왜 그 좋은 법을 그렇게 쉽게 폐지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고 속상해요.”

위원장 시절 군 가산점 제도를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군 가산점 문제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인데요.

“군 가산점제는 1961년부터 시행됐어요. 공무원시험을 칠 때, 군 전역자에게 총 점수에서 5% 가산을 해 주는 거죠. 합격이 0.1%로 좌우되는데, 5% 가산을 해 주니 여성들이 붙을 수가 있겠어요. 진작 문제라는 인식이 많았지만, 남성들이 고위직에 많으니 다들 무서워서 그냥 뒀어요. 그걸 내가 건드렸죠. 국가를 위해 희생한 남성들에겐 미안했지만, 공무원시험에서 가산점을 줄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취지는 다 빼고 얘기가 되니 내가 그때 욕을 많이 먹었죠.”

특위 위원장을 역임하는 동안 윤 전 총장은 끊임없이 여성부(현 여성가족부) 신설을 주장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여성 정책을 주도할 주무 부처 출범은 그를 비롯한 여성계의 숙원이었다. 그의 바람은 2001년 이뤄졌다. 직원 100여 명, 예산 300억원이라는 작은 규모로 출발한 여성부는 어느덧 스무 살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간 여성부는 잊을 만하면 여론의 도마에 오르며 존폐 위기에 시달렸다. 정무장관 체제의 한계 속에서 정권에 따라 정책 기조가 변하기도, 민감한 여성 문제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2004년 성매매 방지법, 2005년 호주제 폐지 등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20년 전 윤 전 총장이 제기했던 여성 문제들 가운데 상당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윤 전 총장은 지난 20년 여성 문제와, 이를 다루는 여성부를 어떻게 지켜봤을까.

1998년 4월16일 대통령 직속 여성특위 현판식 당시 윤후정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 ⓒ 이화학당 제공
1998년 4월16일 대통령 직속 여성특위 현판식 당시 윤후정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 ⓒ 이화학당 제공

2005년 호주제 폐지 판결은 상당히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호주제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예요. 당시 호주제라는, 가족구조를 단단히 받치고 있던 큰 기둥 하나가 무너지자 남자들은 그렇게 반대하며 붙잡으려 했어요. 여성들은 폐지 소식에 만세를 불렀고요. 그 후 10년도 더 흘렀어요. 그런데 민법에선 여전히 ‘호주’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여전히 가족구조에서 차별적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어떤 근본적 문제가 있는지 지금쯤 다시 한번 짚어봐야 합니다. 본래 남녀는 하나가 하나를 다스리고 한쪽이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잖아요. 여성이 본인 의사에 의해 여성으로 태어난 게 아니니까요. 비단 호주제 문제뿐 아니라 이런 차별은 아주 반문화적이고 불공평한 일이죠.” 

여성가족부의 지난 20년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일일이 데이터를 뽑아 평가해 보지 않아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여성의 삶에 마음을 다해 관심 갖고 잘한 장관도 있었고 그냥 여느 업무처럼 생각하며 처리해 온 장관도 있었죠. 여성가족부가 여성의 차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누가 맡든 앞으로 장관들이 여성의 삶을 맘에 잘 지니고 강한 의지를 갖고 풀어나가 줬으면 좋겠어요.” 

 

여성부 탄생 초석 다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1998년 3월 유엔 총회에 참석해 한국의 여성 정책 현황을 발표하는 모습 ⓒ 이화학당 제공
1998년 3월 유엔 총회에 참석해 한국의 여성 정책 현황을 발표하는 모습 ⓒ 이화학당 제공

1988년 노태우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제2정무장관실을 신설, 여성 정책을 전담토록 했다. 처음으로 국내 여성 정책 전담기구가 생겼지만, 여성계는 보다 독립적인 행정부처의 신설을 꾸준히 바랐다. 1997년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당시 후보는 이 같은 여론을 반영해 여성부 신설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여성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출범 후, 행정기구가 아닌 위원회 형태의 여성 정책 전문조직 설치를 추진했다. 그렇게 여성계의 기대 반 아쉬움 반으로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는 탄생했다. 

윤후정 초대 위원장의 분투로 여성특위는 다양한 여성 정책 마련체계를 잡아나갔다. 취임과 동시에 특위에 처음 편성됐던 예산을 늘리고 전문성 갖춘 인력을 영입해 조직을 꾸렸다. 남녀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오늘날 사용되는 ‘성희롱’의 정의를 처음 규정하는 등, 여성계에서 유의미한 사건으로 꼽히는 여러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의결권이 제한되고 집행권도 주어지지 않는 등 특위의 한계는 갈수록 명확하게 드러났다. 여성계의 꾸준한 요구 속에 김대중 정부 집권 4년 차인 2001년 1월29일,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마침내 여성부가 신설됐다. 초대 장관으로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임명됐다. 

직원 100여 명, 예산 300억원의 소규모로 출발한 여성부는 이후 노무현 정부 들어와 몸집을 키웠다. 2005년에는 가족업무까지 이관 받아 ‘여성가족부’라는 명칭을 새롭게 얻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성특위를 이끌면서도 꾸준히 여성부 신설을 대통령에게 요구했던 윤후정 초대 위원장은 지금까지 여성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1년여의 특위 활동 중에도 언제든 여성부가 출범할 수 있도록 밑그림을 그리고 청사진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앞으로 여성가족부를 이끌 장관들이 단순한 업무로서가 아닌 여성의 삶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일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계속해서 (下)편 [윤후정 인터뷰]③ “남녀, 지금 서로에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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