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화백자에 빠진 유럽인들 아리타 도자기 열풍으로 이어져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9 17:00
  • 호수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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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세계사 ①] 동방항로는 포르투갈이, 돈은 네덜란드가 챙겨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다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경우가 딱 그러하다. 포르투갈은 유럽 최초로 아시아 진출 항로를 개척해 인도와 중국, 동남아시아 무역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스페인과 경쟁적으로 전 세계에서 식민지를 운영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해상 제패권이 쇠락하면서 큰 이익을 차지한 것은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얄밉게 계산 빠른 왕서방’의 대표적인 국가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는 원래 자신들이 발트해 주변에서 갖고 온 상품들을 리스본(Lisbon)에 가져와 포르투갈 상선이 동양에서 갖고 온 물품들과 맞바꾸는 등의 방식으로 교역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스페인이 압력을 가하자 네덜란드는 자신들이 직접 동양과 교역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타일로 만든 네덜란드 상선들의 교역 모습(로열 델프트 박물관) ⓒ 조용준 제공
타일로 만든 네덜란드 상선들의 교역 모습(로열 델프트 박물관) ⓒ 조용준 제공

오늘날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에 해당하는 지역은 옛날에 ‘낮은 나라들’이라 불렸다. 이 명칭은 스페인어 ‘Países Bajo’를 그대로 번역한 표현으로, 말 그대로 해수면보다 낮은 이 지역의 특성으로 생긴 말이다. 이런 어원은 또 이곳이 스페인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낮은 나라들’에는 기독교 왕국의 스페인 영토 회복운동, 소위 ‘레콩키스타(Reconquista)’ 때 무슬림과 함께 쫓겨났던 유대인들이 대거 정착해 살고 있었다. 아울러 프랑스의 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 역시 이들에 대한 구교(가톨릭)의 대대적인 탄압과 학살을 피해 ‘낮은 나라들’로 이주해 왔다. 1685~89년 사이에 적어도 20만 명의 위그노가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스위스 등으로 옮겼다. 

위그노의 엑소더스는 프랑스에서 보자면 일종의 ‘두뇌 유출’ 사태였다. 위그노들은 대체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고 상공업자와 기술자가 많았다. 실제로 시계와 가구, 비단 제조며 보석 가공에 뛰어났던 위그노 장인들은 이주한 새로운 땅에서 산업 발달의 기틀을 마련해 갔다. 

신교도 국가와 구교도 국가의 경제력 차이에 대해서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에 잘 나타나 있다. 베버는 신교의 금욕적 윤리가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정신’을 고취시켜 상대적으로 경제 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유대인과 위그노의 정착으로 인해 가장 자본주의적인, 소위 장삿속에 매우 밝은 나라가 된 곳이 바로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는 1600년 무렵부터 시작된다. 1600년 영국이 먼저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데 자극을 받아 우후죽순으로 10여 개가 생겨난 동인도회사를 하나로 통합해 보다 효율적으로 영국·스페인과 경쟁하기 위해 통합 동인도회사(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를 출범시킨 것이 바로 1602년이다. 

청나라 청화백자(1700~20년 제조).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 조용준 제공
청나라 청화백자(1700~20년 제조).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 조용준 제공

근대 유럽 도자사 분수령은 1602년 청화백자 경매

동인도회사가 탄생하면서 네덜란드는 비로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길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해적질과 노략질이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는 시발이 된 것이지만, 어쨌든 이 시기의 네덜란드는 점점 부유해져 벨기에 안트베르펜(Antwerpen)을 따돌리고 암스테르담이 새로운 교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네덜란드가 강력한 동인도회사를 만든 효력(?)은 금방 나타났다. 1602년 바로 그해에 VOC는 중국에서 물품을 가득 싣고 돌아가던 포르투갈 상선 산타리나(Santarina)호를 대서양에서 강탈해 상선에 실려 있던 동양의 ‘귀한 물품’들을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갔다. 그 물품 가운데는 스물여덟 꾸러미의 청화백자 접시와 열네 꾸러미의 작은 사발들이 들어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 본 그 그릇들은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둔탁하고 두터운 석기 아니면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마욜리카만을 사용하던 그들에게, 놀랄 만큼 얇은 두께에 하얀 바탕에 아름다운 그림들이 그려진 청화백자는 그 어느 보석보다도 값어치 있는 보물이었다. 

이문 챙기기에 밝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 보물들을 가만둘 리 없었다. 그들은 암스테르담 항구에서 청화백자와 중국 그릇들을 경매에 부쳤는데,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 반응 역시 완전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 경매야말로 유럽인들이 대규모의 중국 자기를 접할 수 있었던 최초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1602년은 근대 유럽 도자사(陶瓷史)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대만 타이난(臺南)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기지 터 ⓒ 조용준 제공
대만 타이난(臺南)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기지 터 ⓒ 조용준 제공

유럽을 강타한 ‘중국 취향’ 바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2년 뒤인 1604년에도 포르투갈로 귀국하는 카타리나(Catharina)호를 가로챘다. 운 좋게 이 배도 역시 무려 16톤의 중국 청화백자를 싣고 있었다. 배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마자 경매 시장이 열렸다. 이번에는 프랑스 왕 앙리 4세, 영국 왕 제임스 1세 등 유럽 왕실의 대리인들과 수많은 귀족들이 경매에 뛰어들었고 앞다퉈 도자기를 구매했다. 단 며칠 만에 그 많던 물품들이 모두 팔려 나갔다. 중국 청화백자에 대한 입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청화백자를 알게 된 유럽 왕실과 귀족들은 ‘지미추 구두를 처음 신은 에밀리(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여주인공)’와 같았다. 바야흐로 중국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중국 취향)’ 바람이 유럽 전역에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중국 청화백자를 처음에는 ‘크라크 자기(kraak-porcelain)’라고 불렀다. 동인도회사가 강제로 포획해 온 포르투갈의 배가 카라카스(Carracas) 양식의 배, 즉 카라크(Carrack)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라크 배에서 나온 자기’라 하여 ‘크라크 자기’가 된 것이다.

카라크 배는 돛대가 세 개 혹은 네 개로 포르투갈에 의해 15세기 발전했으며 오랜 항해에 적합해 탐사와 무역 등을 위해 대서양을 오가는 배로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스페인 등 강대국 해군의 배로 널리 쓰였다. 포르투갈에서는 이 배를 나우(Nau)라고 불렀고, 스페인은 카라카(Carraca) 혹은 나오(Nao), 프랑스는 카라크(Caraque) 혹은 뇌프(Nef)라고 불렀다. 이 배야말로 대항해 시대를 이끈 선구자적 함선이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중국 도자기는 향신료 이상으로 이득을 남길 수 있는 무역의 중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첫 경매가 있었던 해로부터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 VOC의 배들은 1년에 10만 점이 넘는 중국 자기를 네덜란드로 실어 날랐다. 이 숫자가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VOC의 중국 도자기 독점 무역도 중국 대륙 내부의 정세 변화로 커다란 변수가 생기고 만다. 만주족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청(淸·1636〜1912)이란 국호를 걸고 그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명나라(1368〜1644)를 무너뜨리고 1644년 베이징에 입성한 것이다. 그러고는 쇄국 정책으로 무역 항구의 문을 걸어 잠갔다.  
이곳은 정성공의 근거지이기도 해서 역시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네덜란드가 명나라에 접근했다가 교섭에 실패해 대만(타이완) 남부 타이난(臺南) 일원에 근거지를 구축해 일종의 식민지 경영을 시작한 것은 1624년의 일이었다. VOC가 대만 서쪽의 군도(群島)인 펑후제도(澎湖諸島)를 무력 정복한 다음 1624년 명나라와 협상을 통해, 펑후제도를 포기하는 대신 대만 남부에 상업지역을 만드는 데 합의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2년 후에는 스페인이 진출해 타이베이(臺北)를 위시한 북부를 점령했는데, 네덜란드는 나중에 스페인마저 쫓아내고 대만 전체를 차지했다.

이런 와중에 진먼(金門)과 샤먼(廈門·아모이) 두 섬을 근거지로 중국 동남부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정성공(鄭成功·1624~1662)이 ‘멸청복명(滅淸復明)’을 선언하고 청조에 반기를 들었다. 

정성공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해상무역을 했던 정지룡(鄭芝龍)과 일본 하급무사 다카와 시치자에몬(田川七左衛門)의 딸인 다카와 마쓰(田川鬆) 사이에 낳은 자식으로, 일본 히라도(平戶) 섬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까지 후쿠마쓰(福松)라는 성으로 자랐다. 이런 연유로 히라도에 가면 정성공과 관련된 동상이 여기저기에 있다. 

정성공은 청나라가 해안지역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자신의 발판을 끊자, 1662년 2월1일 포르모사(Pormosa·대만)를 정복함으로써 대만의 38년 네덜란드 식민시대를 종결했다. 지금 대만이 갖는 국가적 정체성은 이때부터 뿌리를 내린다. 네덜란드에서 해적으로 취급받던 정성공은 대만에서는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따라서 대만 남부에 가면 정성공과 관련한 유적과 기념 동상이 상당수 있다.

이렇게 정성공이 대만을 자신의 새 거점으로 삼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대만에서 쫓겨났는데, 이는 잠정적으로 중국 무역에서 철수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네덜란드가 청화백자의 대체재(代替材)로 일본 자기에 주목하고, 일본을 새로운 무역 파트너로 삼은 것에는 바로 이런 사정이 작용했다. 고수익을 안겨주는 시장을 포기할 수 없어 규슈(九州) 아리타(有田) 자기를 대신 수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덜란드 상인을 위한 일종의 무역특구였던 나가사키 데지마를 묘사한 겐에몬(源右衛門) 도판 ⓒ 조용준 제공
네덜란드 상인을 위한 일종의 무역특구였던 나가사키 데지마를 묘사한 겐에몬(源右衛門) 도판 ⓒ 조용준 제공

근대 일본에 서양은 곧 네덜란드

한편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역은 1600년 4월19일 네덜란드 상선 ‘데 리프더(De Liefde)’호가 규슈(九州) 북동쪽 우수키 만에 상륙하면서 처음으로 그 문이 열렸다. 네덜란드 말로 사랑이라는 뜻의 ‘리프더(Liefde)’라는 이름을 가진 이 배는 약 2년 전인 1598년 6월 인도(아시아) 시장 개척의 임무를 띠고 로테르담 항구를 떠난 5척의 배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아 일본에 도착한 배였다.

근대화 시기 일본에 서양은 곧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를 지칭하는 ‘화란(和蘭)’에서 따와 서양학을 ‘난학(蘭學)’이라 부른 것만 보아도 그렇다. 총을 포함해 서구 문명을 일본에 소개한 나라는 1543년 처음 일본에 배를 정박한 포르투갈이었지만, 로마 교황청의 친위대를 자처한 포르투갈은 가톨릭 전파에 너무 지나치게 매달린 나머지 일본 막부의 반발을 사서 그 기회와 자리를 네덜란드에 내주고 말았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문물은 일본에 ‘남만학(南蠻學)’, 즉 남쪽 오랑캐의 학문이었지만, 네덜란드의 ‘난학’은 1623년부터 1850년대 중반까지 200여 년 이상 일본인들이 서양을 받아들이는 잣대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항해 역사를 기념하는 각종 접시 ⓒ 조용준 제공
네덜란드의 항해 역사를 기념하는 각종 접시 ⓒ 조용준 제공

그러므로 네덜란드가 아리타 도자기를 새로운 수출 주력상품으로 삼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리타는 임진왜란 때 사가번(佐賀藩)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1538~1618)에게 도조(陶祖) 이삼평(李参平·출생년 미상~1655)이 ‘금강(錦江)’에서 붙잡혀 일본에 끌려와 1616년(광해군 8년)에 일본 최초의 백자를 만든 이후 일본 도자기 산업의 메카가 된 곳이다. 

1647년 공식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아리타 사기장 집안은 155가구였고, 이들은 모두 이삼평의 총괄 감독을 받았다. 1600년대의 시골 조그만 마을에 도자기를 굽는 가구 수만 155개라니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아리타에서 생산한 도자기는 1651년부터 VOC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후 1653년에는 2200개, 1664년에는 4만5000개를 수출하는 등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며 방대한 수입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가번의 엄중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아리타에서 시작한 가마는 점차 일본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는데, 나카지마 히로이키(中島浩氣)가 1936년에 출간한 《히젠도자사고(肥前陶磁史考)》에 들어 있는 히젠 지방의 옛 가마터에 대한 ‘히젠고요분포도(肥前古窯分布圖)’에 따르면  조선 사기장들이 히젠에서 연 가마만 무려 370군데가 넘는다. 

그리스어 알파벳 ‘오메가’와 ‘알파’가 들어간 수출용 고이마리 주전자(하우스텐보스 도자기박물관) ⓒ 조용준 제공
그리스어 알파벳 ‘오메가’와 ‘알파’가 들어간 수출용 고이마리 주전자(하우스텐보스 도자기박물관) ⓒ 조용준 제공

일본 아리타 도자기, 네덜란드 교역 통해 유럽 진출

네덜란드는 히라도에 둥지를 틀고 무역을 하다가,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나가사키 앞바다의 인공 섬인 데지마(出島)에서 본격적인 교역활동을 전개했다. 아리타 도자기 수출이 최대 사업이 된 다음부터는 아리타 옆 조그만 항구 이마리(伊萬里)가 네덜란드에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지금도 이마리에는 당시 도자기 무역 관련 유적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 

네덜란드는 이렇게 일본과 도자기 무역을 하면서 동양의 자기를 모방해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18세기 이후 명성을 떨치게 되는 델프트 블루(Delft Blue) 신화의 시작이다. 

한편 명나라와 청나라 교체기에 해상노선 봉쇄로 대유럽 자기 수출을 일본에 빼앗겼던 중국 역시 새롭게 도자기 무역을 재개했다. 1673년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재위 1661〜1722)는 쇄국정책을 풀고 해상교역금지령을 취소했다. 그가 내린 교지에는 “강남, 절강, 복건, 광동성 일원의 백성들은 상선을 가지고 바다에 나가 무역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영국 동인도회사가 1713년, 프랑스가 1728년, 네덜란드가 1729년, 덴마크가 1731년, 스웨덴이 1732년 각각 광저우(廣州)에 무역거래소를 설립했다. 광저우의 중국 상인들 역시 1720년 도자기전문협회를 만들어 보다 효율적인 도자기 무역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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