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고발자 많이 나오고 사회가 이들 보호해줘야”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2 17:00
  • 호수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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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백서 제작 이끈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블랙리스트, 씨알도 안 먹힐 분위기 조성돼야”

총 10권, 전체 6622쪽 분량. 그리고 9473명의 피해자.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작성·실행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진상조사 결과를 총망라한 백서가 2월27일 세상에 공개됐다. 2017년 7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출범과 함께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된 지 1년6개월 만의 결실이다. 백서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작성된 블랙리스트 피해자 9473명의 신분과 피해 사실은 물론, 이에 가담했던 가해자들의 면면과 그들의 입장까지 낱낱이 기록됐다. 

방대한 백서 작업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민간위원으로 활동한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줄곧 이끌었다. 김 교수는 2015년 9월 박근혜 정부의 연극 검열 사실을 최초로 폭로해 문화예술계 검열의 이상 징후를 세상에 드러낸 인물이다. 진상조사위가 꾸려지기 전부터 그는 대학로 극단에서 연극인들과 모여 문화예술계 내 부당한 정황들을 파악하는 활동을 했다. 2018년 6월 진상조사위 활동이 종료된 후, 인건비는커녕 사무실도 식대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는 반년을 더 백서 제작에 몰두했다.

문화예술계를 한바탕 뒤흔든 ‘블랙리스트’ 실체는 현 정부 들어서도 여기저기서 여전히 논란이다. 3월4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김미도 교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블랙리스트 작업,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라며 “블랙리스트 작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부당한 지시가 자연스러운 게 아닌, 전혀 씨알도 안 먹힐 분위기가 두루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시사저널 고성준
ⓒ 시사저널 고성준

블랙리스트 피해 사실을 수집하면서 문화예술계 일원으로서 여러 감정이 교차했을 것 같다.

“새삼 여러 번 놀랐고 참담함도 느꼈다. 사건이 너무나 많고 피해 규모가 생각보다 컸던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수년 동안 이렇게나 가해자도 피해자도 많았는데 그 누구도 그동안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또 각 문화예술기관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며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인지하고 실행했던 이들이 다 우리 동료들이었다는 것도 참담했다.”

조사 과정에서 블랙리스트에 가담했던 ‘동료’들은 뭐라고 얘기하던가.

“몰랐다고 한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그나마 감사한 일이었다. 자기는 그냥 ‘이런 리스트가 있는데 참고하라’고 보여줬을 뿐 그대로 수행하라고 한 적은 없다는 논리다. 우리가 백서를 다 쓰고 가해자들에게 해당 내용을 일일이 보여주고 입장을 듣는 작업을 거쳤는데, 그때 청와대 모 행정관은 자신이 ‘지시했다’고 적힌 내용을 ‘지시를 전달했다’로 수정해 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도 청문회에 나와 계속 몰랐다고, 지시한 적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는 곧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무능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안 된다.”

일각에선 ‘공무원들이 지시에 따라야지 뭘 어쩌겠나’ 하는 시선도 있다.

“최근 예술인들이 모인 한 포럼이 있었는데 거기 토론자로 나오신 모 대학 행정학과 교수님도 그런 주장을 하셨다. 행정학과 교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상명하복 체계에선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관성적으로 퍼져 있다. 우리나라가 아직 갈 길이 먼 거다. 현행 법률에서도 이미 ‘공무원은 불법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이를 따른 공무원들은 그동안 거의 전무했다. 부당한 지시를 받은 공무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거부할 수 있도록 이들을 보호하는 체계가 더 탄탄해져야 한다.”

진상조사위 활동 종료 후, 따로 남아 백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2018년 예산을 짤 때 자유한국당이 반대해 진상조사위 예산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막판 몇 개월 동안 기존 백서 발간에 잡혀 있던 적은 예산으로 위원회 전체를 운영해야 했다. 결국 중간에 구조조정으로 위원들을 대거 내보내기도 했다. 위원회 활동조차 종료된 후엔 더 상황이 열악했다. 활동 종료 이후 문체부에서 단 하루도 더 사무실을 못 쓰게 해서 쫓기듯 나와야 했다. 마지막까지 백서 작업에 매달린 실무자 다섯 명은 인건비도 거의 못 받고 식비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다. 섭섭하고 굴욕적이었지만 백서가 세상에 나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텼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 ⓒ 연합뉴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 ⓒ 연합뉴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때 발표한 국정과제 1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관심에서 조금 멀어진 느낌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때부터 블랙리스트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고 또 위원회 내 어려움도 인지하고 있었던 걸로 안다. 그런데 청와대가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아 굉장히 섭섭한 적도 있었다. 소속 공무원을 징계해야 하는 문체부의 사정도 일부 이해하지만, 전반적으로 소극적인 태도가 문제였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지난해 10월 문체부에서 블랙리스트 관련 직원을 단 한 명도 징계하지 않는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그간 쌓였던 게 폭발했었다. 그땐 장관 사퇴론도 주장하고 분위기가 심각했다.” 

당시 도종환 장관 사퇴를 요구하며 문화예술인들이 1인 시위를 벌이곤 했다. 어떻게 갈등이 매듭지어졌나.

“1인 시위를 하면서 우리는 도종환 장관과의 진솔한 대화를 원했다. 장관도 이를 받아들여 지난해 10월 중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시간 넘게 얘기를 나눴다. 장관이 직원들도 배석시키지 않고 우리 진상조사위원들과만 마주했다. 이날이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그 후 장관은 ‘징계 0명’ 결정을 번복하고 사과하며, 징계 재검토를 결정했다. 부처 수장으로서 하기 어려운 결단을 한 데 대한 고마운 마음이 있다.”

백서엔 피해 문화예술인에 대한 배상과 블랙리스트 사태 방지를 위한 여러 권고 사항 및 제도개선 방안도 담겨 있다. 무엇부터 어떻게 이뤄져야 한다고 보나.

“우선 현재 제정 추진 중인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이 속히 마련돼야 한다. 헌법이 명시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문화예술계를 넘어 모든 공무원이 불법 부당한 지시에 적극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이기 때문이다. 또 진상조사위가 빨리 문을 닫게 돼 조사가 채 이뤄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가능하면 진상조사위 후속 기구가 생겨 미진했던 조사를 이어 나가면 좋겠다. 문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과제 1호였던 이 백서에 대해 반응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부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내부 조직 분위기가 더는 지속돼선 안 된다. 내부고발자들이 더 곳곳에서 많이 나와야 하며, 법과 사회가 이들을 더 보호해 줘야 한다. 윗선의 부당한 제안들이 정말 씨알도 안 먹힐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블랙리스트 백서는 우리나라 적폐청산의 가장 모범적인 선례가 될 거다. 꼬리 자르기로 끝나지 않고 김기춘·조윤선 등 수뇌부에 대한 사법처리도 이뤄졌으며, 실제 백서 작업을 하는 동안 문체부 조직 분위기도 많이 유연해졌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서에 대한 더 높은 평가가 이뤄질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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