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왜 다시 페미니즘일까?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3 18:00
  • 호수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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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의 일이다. 항공사 여승무원을 대상으로 한 특강 기회가 있었다. 당시 여승무원들은 결혼과 동시에 퇴사하는 관행은 사라졌지만 출산하면 암묵적으로 퇴사 압박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덕분에 결혼 자체를 연기하거나 결혼을 해도 출산을 최대한 미루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고 했다.   

졸업 후 KBS에 입사한 75학번 선배는 자신이 항상 KBS “최초의 여성”이었노라 고백했다. 남녀고용평등법 이전에는 여성도 남성처럼 승진시켜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단다. 고마운 법의 혜택을 누리게 된 첫 주인공으로서 자신은 최초의 여성 차장으로 승진도 했고 최초의 교육연수원장 자리에도 올랐다 했다. 지난해던가 후배 교수가 감사원의 차관급 감사위원으로 위촉됐는데, 놀랍게도 ‘최초의 여성’이란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대단한 지위든 소소한 자리든 아직도 ‘최초의 여성’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착잡함을 떨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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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물결이 거세지고 있는 요즈음, 운동의 뿌리를 찾아가자면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마땅할 것이다. 일단 서구 페미니즘의 유입 이후만 생각해 본다면,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학가의 여성학 강의는 발 디딜 틈 없이 수강생으로 꽉 찼고, 페미니즘 깃대를 꽂기만 해도 청중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온다 했다. 그러다 1990년대 중후반을 지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여성학의 여(女)자만 들어도 머리에 쥐가 난다” “나는 정말 페미니스트가 싫다”를 당당히 외치는 분위기가 캠퍼스를 압도해 갔다. 

그리고 지난해 ‘미투’와 더불어 다시금 페미니즘이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요즘 서점에 가면 제법 눈에 잘 띄는 자리에 페미니즘 서적이 놓여 있고, 대학가에선 페미니즘 관련 수업을 늘려 달라는 요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남성들 모임까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부터 온건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에 이르기까지, 여성들 내부에도 다양한 입장과 다채로운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터. 어떠한 목소리든 페미니스트의 외침이 공감대를 얻고 있는 이면에는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음이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국 사회만 그런가 하는 의구심에 자료를 찾아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이란 책을 집어 들게 됐다. 저자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제시카 베네트. 월스트리트저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올랐다는 책이다.  

베네트의 주장인즉, 자신들은 어린 시절부터 “남녀차별은 모두 사라졌으니 네 능력을 마음껏 펼쳐라. 그리고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오르라”는 격려와 기대 어린 시선하에 성장했다는 것이다. 한데 막상 사회에 발을 내딛고 보니, 미묘한 차별에 걸려 넘어지고 뿌리 깊은 젠더 고정관념의 벽에 부딪히다, 때론 악의적 조롱에 시달리면서 “나만의 문제일 거야” 하는 자책에 빠지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똑똑한 전문직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경험을 털어놓다가 모두의 처지가 같음을 확인하고는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책은 흥미진진한 내용에 재치 있는 대처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그저 가르치려 드는 남성’ ‘여성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인 양 포장하는 남성’ ‘여성의 말을 수시로 가로채는 남성’들을 비난만 하다 끝나진 않는다. ‘오피스 맘 역할을 전담하는 여성’ ‘자신의 성과를 행운 탓으로 돌리는 여성의 과잉 겸손’ ‘여성 내부의 이중 잣대’ 등도 구구절절 반성하고 있다. 지금 페미니즘이 다시 목소리를 드높이는 이유, 그건 법과 제도를 통해 제거한 줄 알았던 장애물이 관행과 의식 속에 굳건하게 남아, 여전히 미묘한 차별과 소모적 배제를 반복하고 있음에 대한 분노와 좌절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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