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돈》, 안전한 베팅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6 12:00
  • 호수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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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스트리트》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함께 본 ‘탐욕의 시장’

‘돈은 잠들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며 미국 금융가 탐욕의 상징이 된 《월 스트리트》(1987)의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러스). 그가 감옥에 들어간 후에도 수많은 금융 샛별들이 ‘포스트 게코’를 자처하며 돈을 향한 야망을 드러냈다. 오죽하면 마이클 더글러스는 자신이 연기한 게코를 ‘롤모델’로 삼는 경영대학생들이 많다는 소식에 경악했을까. 

실존 인물 조던 벨포트를 영화화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4)의 마지막 장면은 어떤가. 금융 사기로 감옥에 다녀온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책으로 발간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다. 강연 무대에 오른 그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청중의 모습은 그 자체로 거대한 반전이고 충격이다. 고든 게코의 말대로 돈은 결코 잠들지 않았으며, 돈을 향한 탐욕은 자본의 신앙이 됐다.

영화 《돈》의 한 장면 ⓒ (주)쇼박스
영화 《돈》의 한 장면 ⓒ (주)쇼박스

주인공 조일현에게 있는 것과 없는 것

박누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돈》의 주인공 조일현(류준열)은 이 탐욕의 시장에 갓 데뷔한 신참 주식 브로커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 그 꿈이 그를 한국의 월가로 이끌었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실적 0원 상태가 지속되면서 조일현의 꿈은 휴지조각이 될 처지에 놓인다. 위기의 순간, 베일에 싸인 작전 설계자 번호표(유지태)가 나타난다. 클릭 몇 번으로 거액을 손에 쥐게 해 주겠다는 번호표의 제안이 달콤하다. 당신이라면 그 제안을 고민 없이 거부할 텐가. 설마. 일현은 번호표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돈의 맛’에 취한다. 

마케팅 과정에서 공개된 포스터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돈》이 더 큰 채무를 지고 있는 영화는 《월 스트리트》다. 권력을 움직이는 번호표와 그런 번호표에 영혼을 파는 조일현의 관계는 《월 스트리트》의 두 주인공 고든 게코와 버드 폭스(찰리 쉰)를 연상시킨다. “탐욕은 선하다”는 말로 버드를 흔들었던 게코의 대사는 “어디까지가 불법이고, 어디까지가 합법인데요?”라는 번호표의 말로 변모해 일현의 판단력을 흐린다. 물론 한국에서 태어난 일현은 다르다. 그에겐 할리우드 금융 영화 캐릭터들에게 없는 것이 있고, 있는 것이 없다. 

《월 스트리트》에서 버드 폭스가 게코의 눈에 들고,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에 탑승할 수 있었던 것은 숫자를 가지고 놀 줄 아는 비범한 능력 덕분이었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조던 벨포트의 경우 조금 더 재미있는데, 그를 성공으로 이끈 8할은 ‘현란한 언변’이었다. 그것이 거짓말이고 사기이긴 했으나, 어쨌든 자신의 장기를 이용해 수수료가 비싼 페니 스톡(투기적 저가주)을 팔아 주머니를 채웠다. 금융 관련 영화 중 걸작이라 평가받는 《빅 쇼트》(2016)에는 아예 천재 금융인들이 등장한다. 모두가 돈의 흐름을 방관하고 있을 때 이들은 세계 금융위기를 예측했고, 이를 기회로 삼아 돈을 벌었다.

《돈》의 조일현에게 발견되는 아쉬움은 여기에 있다. 영화 초반 조일현은 주식 종목코드를 다 외울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이후 이렇다 할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더 엄밀히 말해 조일현이 번호표에게 발탁된 이유는 그가 재능 있는 인재였기 때문이 아니다. 적당히 무능했기 때문이다. 시장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버드 폭스와 조던 벨포트와 《빅 쇼트》의 인물들이 번뜩이는 자신만의 지략을 펼쳤던 것과 달리, 조일현은 번호표에게 의지해 거래를 할 뿐이다. 금융 소재를 다룬 영화의 주인공치고 일현이 다소 무능해 보이는 건 이 때문이고, 매력도가 떨어지는 이유다.  

그럼에도 이것을 《돈》의 약점이라 단정하기 망설여지는 이유는, 더 나아가 옹호할 여지를 찾게 하는 것은, 그것이 관객들로 하여금 캐릭터에 공감하게 하는 통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금융범죄 영화의 주인공들은 우리보다 ‘뛰어난’ ‘비범한’ 인물이란 인상이 컸다. 괴리감이 있었다. 《돈》의 조일현은 다르다. 그는 진입장벽을 허문 후 관객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이건 당신에게 닥칠 수도 있는 일이야”라고.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정작 부자가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서민들은 돈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투자를 하고, 은행은 뚜렷한 기준 없이 대출을 남발한다. 수수료를 위해 매진하는 브로커조차 돈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베팅에 참전한다. 조일현이 위기에 빠진 건 그래서다. 영화 밖에는 수많은 조일현들이 존재한다. 《돈》이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주인공을 내세운 이유다. 
조금 더 과감하게 베팅했더라면

《돈》의 호불호를 가르는 진짜 요소는 지나치게 안전한 투자에 기울어져 있는 연출이다. 주인공의 변화가 예측 가능한 틀 안에서 다뤄지면서 관객이 상상할 의지를 꺾어버린다. 장르적 재미를 살린 범죄 오락물을 만들겠다는 마음과, 자본주의 시스템을 저격하고 싶은 야심 사이에서 망설이는 인상도 있다. 아쉽게도 이 두 가지를 절충하는 과정에서 비약되거나 두루뭉술하게 생략되는 신들이 노출된다. 금융 사기극으론 칼날이 무디고, 범죄물로선 포만감이 적다.  

전형적인 전개에 비해 상업영화로서의 리듬감이 좋은 건 《돈》의 큰 장점이다. 1년의 현장 취재를 통해 획득한 세부적인 여의도 풍경 묘사도 흥미롭다. 영화 촬영과 개봉 사이에 몇몇 배우들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확 올라가면서, 장면 장면들에 더 힘이 실린 것도 예기치 않은 《돈》의 수확이다. 

(왼쪽)영화 《빅 쇼트》, (오른쪽)영화 《라스트 홈》 ⓒ (주)롯데엔터테인먼트·(주)브리즈픽처스
(왼쪽)영화 《빅 쇼트》, (오른쪽)영화 《라스트 홈》 ⓒ (주)롯데엔터테인먼트·(주)브리즈픽처스

《돈》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

할리우드에서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특히 미국인들의 삶을 뒤흔든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금융범죄 영화는 단순한 오락물을 뛰어넘어 진지한 장르물로 진화했다. 

《빅 쇼트》는 금융위기 과정에서 돈을 번 월가 투자자들의 이야기다. 금융 천재들의 베팅을 통해 미국 금융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하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준다. 《빅 쇼트》가 위기 속에서 돈을 번 사람들을 조명했다면, 《라스트 홈》(2016)은 그 반대 지점을 보여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집을 뺏긴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영화 《마진콜》(2013)은 리먼브러더스 파산 하루 전의 24시간을 다루고 있다. 정리해고 된 직원이 떠나기 전 회사가 보유한 주택저당증권(MBS)의 가치가 폭락해 큰 위기가 닥칠 것을 알게 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 모든 이야기를 보다 자세하게 만날 수 있는 작품은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잡》(2011)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금융위기의 실체를 고발하기 위해 만든 영화로 금융 전문가, 학자, 저널리스트 등의 다양한 인터뷰와 자료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문제점을 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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