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타계로 시험대 오른 ‘샤넬’…숨죽이는 명품업계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7 09:00
  • 호수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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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불가’ 존재 샤넬의 수장 칼 라거펠트의 갑작스런 죽음
“칼 그늘 벗어나 창조적 비전 제시할 수 있을지가 관건”

“그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2월19일 타계한 세계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에 대한, 베르나르 아르노 LVMH(루이뷔통 모에 헤네시)그룹 회장의 말이다. LVMH는 루이뷔통·디오르·펜디를 소유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명품 그룹이다. 칼 라거펠트는 또 다른 명품업계의 대표주자인 ‘메종 샤넬’의 수장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각별했다. 아르노 회장이 대학을 들어가기도 전인 1965년 칼 라거펠트는 펜디의 여성복 부문 수석 디자이너였다. 고인의 유언대로 장례식 없이 진행된 화장 절차에 참여한 극소수의 인사 중 하나가 바로 아르노 회장이었다. 명품업계 1·2위를 다투는 경쟁업체의 막강한 실력자의 퇴장에 대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는 이는 비단 아르노 회장만이 아니다. 먹고 먹히는 ‘전쟁’으로 치열한 국제 패션무대지만, 칼 라거펠트라는 존재에 대해선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36년간 샤넬의 전성기를 이끈 칼 라거펠트 ⓒ DPA 연합
36년간 샤넬의 전성기를 이끈 칼 라거펠트 ⓒ DPA 연합

명품 시장에서 대중적 친밀도도 높여

그는 패션업계의 ‘제왕’으로 불려왔으며, 패션 디자인을 넘어 사진가·연출가로 활약하며 패션과 명품 산업의 아이콘으로 각인돼 왔다. 부유층의 전유물인 오투 쿠튀르(고급 맞춤복)의 심장부에 있으면서도 대중적 호감도를 잃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 대중의 반감을 살 수 있는 명품업계의 황제였음에도 코카콜라 디자인에 등장하는가 하면, H&M과 같은 중저가 브랜드 디자인에 참여해 대중적 친밀도를 높였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해 명품 시장의 진입 문턱을 낮춘 것도 그가 널리 사랑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건 그의 꾸미지 않는 ‘직설 화법’이었다. 독일 출신임에도 메르켈 독일 총리의 의상을 두고 “늘 형편없다. 최악이다”고 독설을 날리는가 하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샤넬 백을 두고도 “디스코텍 소파 같은 디자인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셀프 디스’를 해 대중의 열광을 샀다.

칼 라거펠트는 무려 36년을 샤넬의 수장으로 있었다. 그의 후임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커다란 그의 빈자리를 두고 ‘칼 이후의 샤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패션업계는 ‘마에스트로의 퇴장’이 향후 명품 산업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018년 기준 전 세계 명품 시장(의상·보석·피혁·미용 등) 규모는 2800억 유로(약 356조원)로 추산된다. 그 가운데 프랑스는 명실공히 세계 명품 산업의 최강국으로 꼽힌다. 세계 10대 명품업체 중 3개(LVMH·로레알·케링)가 프랑스 기업이다. 100대 기업 중 9개 업체가 프랑스에 적을 두고 있다.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이끄는 LVMH는 프랑스 증시 CAC40 상장을 통해 업계 1위를 굳힌 반면, 샤넬은 비상장 기업임에도 매출 규모가 2위다. 샤넬 창업 이래 108년 만에 최초로 재무제표를 공개한 2018년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총매출은 86억 유로(약 10조9000억원)이며, 순이익률이 무려 28%에 이르는 초우량기업인 것으로 나타났다.

칼 라거펠트 사망 2주 후인 3월5일 샤넬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그를 추모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AP 연합
칼 라거펠트 사망 2주 후인 3월5일 샤넬 패션쇼에서 모델들이 그를 추모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AP 연합

새 수장, 칼 라거펠트 그림자 벗어날 수 있을까

칼 라거펠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영원히 안정적일 것만 같던 샤넬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칼을 떠나보낸 샤넬은 그의 오른팔이자 샤넬 패션의 스튜디오 디렉터였던 버지니 비아르를 후임자로 공식 발표했다. 파격적인 변화보다는 지금까지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안정화를 이어가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이에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비아르가 라거펠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확실한 창조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가 향후 샤넬의 미래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고민에 빠진 샤넬과 별개로 전 세계 명품업계의 전망은 여전히 밝은 편이다. 명품 산업 분석업체인 ‘벤&코/아타감마’의 매니저 컨설턴트 페데리카 레바토는 약 6%에 이르는 2017년의 성장세가 2018년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성장이 ‘가격 상승’이 아닌 ‘판매수량 증가’에 기인한 것이니만큼,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도 평가했다. 

이러한 성장을 가능케 한 요인은 ‘중국’,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중국이 꾸준히 전 세계 20%대의 소비시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만 18세에서 35세 사이 세대를 가리키는 ‘밀레니얼 세대’가 명품 시장의 새 고객층으로 등장해 ‘큰손 구매’를 이어가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는 최근 성장세의 85%를 차지할 정도로 막대하다.

또한 향후 명품 시장에 또 하나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e-commerce(전자상거래)’의 증가 추세다. 로이터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인터넷을 통한 구매는 2017년에만 24% 증가했으며, 이는 전체 매출의 9~10%에 이른다. 오는 2025년엔 25%까지 증가할 것으로 업계는 관측하고 있다. 칼 라거펠트가 이끌었던 샤넬은 브랜드 이미지 손상을 이유로 온라인 시장 진출을 거부해 오다가 2015년 시장 환경이 역전되면서 뒤늦게 진출했다. 칼 라거펠트는 당시 여든하나의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온라인 브랜드를 론칭했다. 다소 늦었지만 이러한 결정은 역시 칼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샤넬을 맡을 새 선장이 그간 하늘을 찌르던 콧대를 내리고 변화하는 명품 시장 흐름에 얼마나 잘 적응해 나갈지도 현재 샤넬 팬들의 관심 중 하나다.

피 터지는 명품 패션계 경쟁에서 긴 세월 ‘1등 수성’을 이뤄내고 스스로 패션의 아이콘이 된 칼 라거펠트. 그가 가진 파워와 상징성이 무거웠던 만큼, 새로 샤넬을 이끌 새 리더의 어깨 또한 결코 가벼울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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