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초의 동양 자기 짝퉁 ‘델프트 블루’의 탄생과 튤립 파동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22 15:12
  • 호수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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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세계사 ②] 네덜란드 황금시대 배경으로 ‘튤립 모시는 파란 꽃꽂이’ 대유행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가 가운데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1632~1675)가 있다. 그의 고향은 네덜란드 델프트(Delft). 베르메르가 태어나 마흔세 살 짧은 생애를 살며 사랑하고, 그림을 그렸던 도시다.

베르메르 그림이 인기가 좋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파란색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 하나다. 베르메르 그림에는 파란색이 많이 등장한다. 언제부턴가 그의 대표작이 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비롯해 《우유 따르는 여인》 《레이스 뜨는 여인》 《물 주전자를 든 젊은 여인》 《버지널 옆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 《연애편지》 등 많은 그림에서 파란색이 시선을 끈다.

델프트 시내 도자기 가게의 ‘귀걸이를 한 소녀’ 접시 ⓒ 조용준 제공
델프트 시내 도자기 가게의 ‘귀걸이를 한 소녀’ 접시 ⓒ 조용준 제공
델프트 블루  바이올린(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 조용준 제공
델프트 블루 바이올린(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 조용준 제공

베르메르는 어떤 안료로 이런 파란색을 만들어냈을까? 그의 팔레트에는 어떤 물감이 들어 있었을까? 그의 그림에 쓰인 파란색 안료의 대부분은 청금석(靑金石), 즉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라는 광물로 만든 ‘울트라마린(ultramarine)’이라는 안료다. 광물질이므로 캔버스에 그리기 위해 곱게 갈아서 아교와 오일 등을 섞어 만든 안료가 바로 울트라마린이다.

그런데 최고급 청금석은 오로지 아프가니스탄 북부 산악지대 바다크샨(Badakshan) 지역에서만 생산된다. 이곳 청금석은 이미 기원전 4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오직 파라오만이 청금석을 소유할 수 있었다. 청금석은 색채가 항구적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금과 동일한 위치를 차지했다. 청금석과 금을 이용해 만든 귀금속은 파라오의 황금마스크에 장식돼 파라오와 사후 세계를 함께했다.

중세 이후 유럽에서는 청금석으로 만든 울트라마린이 최고급 안료 대접을 받으며 매우 귀중하게 사용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 대가들도 울트라마린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반드시 그림 의뢰자와 ‘이번 그림에는 청금석 얼마를 사용해 어느 위치에 그린다’는 식의 계약을 맺었다. 워낙 고가이므로 횡령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현재도 청금석은 순금보다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다. 고급품은 1kg에 1만5500유로(약 2000만원)를 호가한다.

베르메르가 이토록 귀한 청금석을 쉽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네덜란드가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글에서 1602년 동인도회사를 만들면서 네덜란드가 부국강병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베르메르는 이런 황금기에 태어나 활약했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돈이 여기저기서 넘쳐났고 신흥부자들, 다시 말해 그림을 사서 과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었기에, 귀한 청금석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튤립 문양의 16세기 중반 화려한 이즈니크 접시와 술병(프랑스 파리 세라믹 박물관) ⓒ 조용준 제공
중국 취향 가구에 놓인 청화백자들(헤이그 시립박물관) ⓒ 조용준 제공

코발트블루 사용한 유럽 최초의 도기 

암스테르담도 아닌, 델프트라는 소도시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도 동인도회사의 출범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동인도회사가 도자기 무역을 했기 때문에 델프트웨어(delftware·델프트 그릇)를 만들던 네덜란드 사기장들은 비로소 동양의 푸른빛, 청화백자(靑華白磁)를 만날 수 있었다. 

품질이 월등히 좋은 중국과 일본 자기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델프트 마욜리카 도기 산업도 일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위 유행이 변한 것이다. 눈이 높아진 소비자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려면 그들 역시 제품의 질을 높이든지, 디자인을 바꾸든지 무엇인가 변해야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모방이었다. 델프트 사기장들은 그들도 하얀 백자에 파란 그림을 넣은 제품을 만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모방을 시작했다. 1615년이 되면서 이들은 백색 주석유약(white tin glaze)으로 표면을 하얗게 만들어 그 위에 코발트블루로 무늬를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투명 유약을 또 한 번 칠함으로써 적어도 겉으로는 청화백자에 가까운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유럽 최초의 동양 자기 모방품이었다. 

1620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재위 1572~1620)가 사망한 뒤부터는 모방이 본격화되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노선이 끊겼기에, 자연스레 모방 제품에 대한 수요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코발트블루를 사용한 유럽 최초의 도기인 ‘델프트 블루’가 탄생하고, 델프트에도 공장이 급속히 늘어나게 된다.

1640년부터 1800년께까지 델프트 사기장들은 대부분 중국 자기를 성공적으로 모방할 수 있었다. 자기가 아닌 도기라고 할지라도, 청화백자를 모방한 첫 상품이었으므로 델프트 블루는 점점 유명해졌고, 유럽에서는 푸른 염료로 그려진 도기 제품과 타일 모두를 일컫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설사 델프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도 그렇게 불렸다.

델프트웨어는 소소한 가정용품부터 예술적인 장식품까지 모두 만들었다. 델프트웨어 전성기는 1640년부터 1740년까지 약 100년 정도다. 이때는 델프트 블루가 거꾸로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고, 중국과 일본이 델프트 모방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마이슨(Meissen)에서 1710년 유럽 최초의 경질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유럽 각국에서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항할 경쟁력이 없었던 델프트 도기는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1750년 무렵부터 델프트웨어는 식탁에 놓이는 그릇이나 접시보다는 주로 미적인 장식용품 생산 쪽으로 흘러갔다. 18세기 말쯤에는 장식용이 아닌 실용 도기는 영국(특히 웨지우드)과 독일 도자기에 밀려 거의 시장을 잃었다. 

(왼쪽)2007년에 복원한 델프트 튤립꽂이(1692~1700 제조 추정,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오른쪽)청나라 불탑(1765~1770 제조 추정) ⓒ 조용준 제공
(왼쪽)2007년에 복원한 델프트 튤립꽂이(1692~1700 제조 추정,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오른쪽)청나라 불탑(1765~1770 제조 추정) ⓒ 조용준 제공

튤립꽂이 화반(花盤)과 피라미드식 화탑(花塔)

델프트 블루 제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튤립꽂이 화반(花盤)과 피라미드식 화탑(花塔)이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대표 상품이라 할 수 있는 튤립이나 히아신스 등 꽃을 꽂을 수 있는 좁고 가느다란 대롱이 서너 개 혹은 예닐곱 개 달려 있는 화반과 이러한 화반이 마치 피라미드처럼 층층이 올라가는 탑을 말한다. 화탑은 꽃을 꽂는 대롱만 아니면 그 모양이 영락없는 동양의 파고다(佛塔)이다.

청나라 시대 파고다와 델프트 튤립꽂이를 비교하면 한눈에 보아도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층층 누각으로 구성된 튤립꽂이를 구상했다는 사실 자체가 동양 파고다에서 얻은 영감일 것이다. 튤립꽂이의 아래 기단에 중국 가정집 풍경을 그려 넣어서 동양적 느낌을 강조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까다로운 작업을 거쳐야 했으므로 튤립 파고다는 그리 많은 수가 제작된 것은 아니다. 실제 이런 대형 꽃꽂이를 세워놓을 수 있는 장소도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단층의 몸통에 서너 개부터 열 개 미만까지 꽃을 장식하는 꽃꽂이가 쏟아져 나왔다. 이 제품들은 오늘날도 네덜란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튤립꽂이가 델프트 블루의 대표 상품이 된 것은 당연히 튤립에 대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애정에서 기인했다.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의 거품경제로 일컬어지는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파동과 튤립 화반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원래 중앙아시아 톈산(天山)산맥 일원이 원산지로 알려진 튤립의 세계화는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이뤄졌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세력을 넓히는 가운데 튤립과 만나 순식간에 매료되었고, 몇 종의 튤립을 재배해 품종을 개량하는 과정을 거치며 점차 튤립이 그림과 그릇, 옷 등의 문양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튤립에 대한 이들의 사랑은 오늘날 이스탄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스탄불 톱카피(Topkapi) 궁전 하렘의 너무나 화려한 이즈니크(Iznik) 타일장식이나 이즈니크 도자기에서 가장 빛나는 걸작은 바로 튤립 문양이다.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유럽 가까이 다가온 튤립은 16세기가 되면서 상인에 의해 유럽 각지에 전해졌다. 네덜란드 최초의 튤립 재배는 1593년 플랑드르의 식물학자인 샤를 드 레클루제(Charles de l’Écluse)가 레이던(Leiden)대학에 초빙되면서 튤립을 가져와 시작한 것으로, 이를 통해 관상용 재배가 점차 확산되었다.   

델프트 블루 튤립꽂이·델프트 블루 나막신(1600~1675 제조 추정,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 조용준 제공
델프트 블루 튤립꽂이·델프트 블루 나막신(1600~1675 제조 추정,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 조용준 제공

귀하신 튤립 모실 수 있는 파란 꽃꽂이

1630년대 들어와 네덜란드에서는 터키에서 수입한 튤립이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점차 튤립 구근(球根)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고, 사재기는 물론 미래 어느 시점을 정해 특정한 가격에 매매한다는 계약을 사고파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다. 

튤립 파동의 정점은 1637년 2월이었다. 현물거래 없이 너도나도 선물거래에 뛰어들면서 튤립은 숙련된 장인이 버는 연간 소득의 10배보다 더 높은 값으로 팔려 나갔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가상화폐나, 여전히 거품경제의 주범이 되고 있는 아파트 투기 광풍과 진배없다. 

돌연변이의 하나로 보라색과 흰색 줄무늬 꽃을 가진 ‘센페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영원한 황제)’라는 품종은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했기 때문에 구근 하나가 1만 플로린(florin)까지 치솟은 것도 있었다. 서유럽 최초의 주조 금화인 플로린은 1252년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에서 시작되었고, 중세의 기축통화를 담당했다. 근대에는 네덜란드 플랑드르 플로린(Flanders florin)이 유럽 전체의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 1플로린이 지금의 약 300달러에 해당하니, 1만 플로린이면 3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이다.

이러한 희귀품종들은 개수로 판매하지 않고 무게를 재어 값을 매겼다. 그야말로 인간 탐욕의 극대치였다. 희귀종 튤립 구근 하나로 고급 맨션을 살 수 있었고, 실제 그렇게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도 나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가격이 하락세로 반전되면서 팔겠다는 사람만 넘쳐났으므로 결국 거품이 터졌다. 상인들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영지를 담보로 튤립에 투자했던 귀족들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 결국 관청이 나서서 모든 계약을 일괄 무효로 하는 것으로 사태가 정리되면서 상당수 파산자와 소수의 벼락부자를 남긴 채 튤립 파동의 막이 내렸다.

따지고 보면 튤립 파동의 근원은 네덜란드가 해상무역으로 떼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되면서 여유가 생기자 튤립 같은 꽃에 마음을 빼앗기고 투자도 할 여력이 생겨난 것이지, 먹고사는 데 정신이 없었더라면 관상용 꽃을 위한 구근 하나가 집값을 넘어서는 정신 나간 짓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덕택에 오늘날 튤립이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수출상품의 하나로 발전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델프트 블루의 탄생과 번영 역시 똑같은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먹고살 만해지자 청화백자를 꼭 빼닮은 ‘신비의 블루 도자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고, 너도나도 사들여 식탁과 집 안 치장에 나섰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튤립이 유행의 선두에 나서자 ‘귀하신 튤립을 모실 수 있는 파란 꽃꽂이’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이렇게 델프트 블루와 튤립 광풍은 서로 떼놓을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졌다.  

오늘날 네덜란드 여행자들은 모든 거리의 기념품 가게에서 델프트 블루 튤립 화반을 마주하게 된다. 도기로 만든 나막신, 풍차와 더불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상품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으면 튤립꽂이 화반이 그냥 평범하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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