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요셉은 그렇게 아버지가 되었다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23 17:00
  • 호수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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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는 위헌이다”
교회, 수태고지의 시점에서 생명의 잉태 생각해야

조만간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위헌 여부 선고가 있다. 낙태가 죄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정부의 인구정책과 종교계의 교리가 맞물려 다분히 위선적이고 솔직하지 못한 채로 계속 이어지고 있어, 이번에야말로 위헌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요구가 드높다. 가장 강경한 반대세력으로 나서고 있는 기독교계, 특히 가톨릭의 입장을 살펴보다가 문득 성서 최초의 낙태 미수 사건에 마음이 가서 머문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라는 이 사건. 기독교의 출발점이다. 

이 사건에서 전통적인 해석은 구세주의 탄생을 위해 마리아와 요셉이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니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 요소를 빼고 읽어보자. 요셉은 비록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상황임에도 사랑하는 여자가 모욕이나 불이익을 당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혹은 원치 않는 아이가 생긴 상황일 수도 있다. 요셉은 비밀리에, 즉 자신이 생각할 때 마리아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다. 현대의 조건에서는 어쩌면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낙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요셉은 “마리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 일을 받아들여 아버지가 된다. 요셉을 인류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불러도 될 것 같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전시된 바르톨로뮤 무리요 작 ‘성가정’ ⓒ EPA 연합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전시된 바르톨로뮤 무리요 작 ‘성가정’ ⓒ EPA 연합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불러도 될 요셉

요셉처럼 나도 마리아의 안위가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 그러므로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교회의 처신에 할 말이 많다. 교회는 하느님이 마리아의 잉태 사건을 어찌 다루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마리아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수태고지(受胎告知·Annunciation)라고 이름 붙여졌지만, 실제로는 엄마가 되라는 요청 아니겠는가. 하느님은 가브리엘 대천사를 보내 그 아이가 장차 구세주가 될 것이라고 설득을 한다. 그러니 아이를 낳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지만 이 탄생은 요셉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요셉이 마리아를 내친다면 아마도 마리아는 아이를 배 속에 넣은 채로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2019년 대한민국에서 미혼모의 처지는 돌에 맞아 죽는 것보다는 좀 낫겠지만, 어떻든 고통스러운 처지가 될 것이고. 그것을 하느님이 내버려둘 수는 없다. 요셉이 책임을 회피한다면, 아기는 낙태된다. 천사는 다시 요셉을 설득한다. 받아들이라고. 그리하여 성(聖)가정을 이루라고. 요셉이 결단을 내렸을 때 이 서사는 완성된다.

낙태의 문제는, 임신할 수 있는 여성뿐 아니라 수태시킬 수 있는 남성의 문제이고 책임임을 교회는 사회를 향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이 수태고지 사건의 현대적 의미다. 교회는 낙태가 아니라 수태고지의 시점에서 생명의 잉태를 생각할 정도는 되어야 교회다. 다시 말해, 잉태된 생명을 바라보는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을 그 임신에 관여한 두 사람이 제대로 알도록, 즉 낙태를 단순히 태아의 생명의 층위에서가 아니라 수태고지의 시점에서 바라다보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다. 교회 밖의 사람들 일은 가이사르에게 맡겨두고, 교회 안의 사람들에게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의무다.

나아가, ‘원치 않는 임신’을 야기하는 모든 문제에 바로 그 ‘원치 않음’의 목록을 만들어내는 사회가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일, 이 또한 교회와 사회의 의무라는 것을 요셉의 처신이 말해 준다고 하면 좀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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