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생각의 시계추
  • 정두언 前 국회의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03 18:00
  • 호수 153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죽어라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죽어라 놀았다. 그러다 보니 학점은 학사경고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공부하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훗날 학생운동의 기지 역할을 하던 대학문화연구회였다.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여기서 만났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이전까지의 내 생각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베트남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었던 베트남 전쟁이 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베트남 민족의 자유를 억압한 전쟁이었다니! 이것은 미국 국방부의 백서를 통해서 밝혀진,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 이후 필자는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지식과 생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가 내게 줄곧 거짓을 가르쳐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나는 점점 싸움꾼이 되어 갔다. 부모님과 싸우고, 형제들과 싸우고, 친구들과 싸우며 나는 세상을 미워했다.

당시 내 생각의 시계추는 3시에서 9시 방향으로 확 바뀌어 있었다. 그러다가 군대를 갔다 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시계추는 다시 6시 방향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혹자는 세상과 타협한 게 아니냐, 배부르고 등 따시면 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런 면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생각의 시계추가 균형을 잡았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어쨌든 필자는 이제 과거의 싸움꾼은 아니다. 한데 이 사회는 아직도 과거의 나와 같은 싸움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들을 보면 나이를 먹어도 생각이 전혀 변하지 않은 게 대단하고, 반면에 두 눈으로 보아도 알기 어려운 세상을 한 눈으로만 바라보고 산다는 게 의아하기도 하다. 좌우 모두를 지칭해서 하는 말이다. 흔히들 수구우파니 꼴통우파니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수구좌파나 꼴통좌파라 불러도 될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북관계에서 일방적 퍼주기가 아니라 상호주의를 주장하면 반대편으로부터 무슨 전쟁을 부추기는 민족의 원수 취급을 당한다. 또 한·미 동맹을 얘기하면 대미종속을 말하며 식민지 사대주의자로 몰아간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서민들의 삶이나 인권 또는 복지를 강조하거나, 대북 화해와 대화를 주장하면 무조건 빨갱이 취급을 하며 대화조차 안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2012년10월17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유신쿠데타 40년 맞이 독재 실상 알리기 집중행동주간 선포식'에서 정동익 민주행동 상임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2년10월17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유신쿠데타 40년 맞이 독재 실상 알리기 집중행동주간 선포식'에서 정동익 민주행동 상임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의 추가 그렇게 양극단으로 갔다가 다시 내려오지 못할까. 세상일이란 다 원인과 이유가 있는 법인데 과연 그게 무얼까. 혹시 이런 건 아닐까. 유신독재 시절이었다. 유정회라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 교섭단체가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이 단체의 대변인으로 J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성명이나 논평은 곡학아세의 표본이었다. 당시 한창 혈기왕성했던 필자는 TV에서 그만 보면 분노에 치를 떨었다. 10·26이 나고 그는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나중까지 다 잘 먹고 잘산 것으로 알고 있다. C일보의 청와대 출입기자가 있었다. 이 사람의 기사는 한마디로 독재 권력의 논리 그대로였다. 필자는 신문에서 이 사람의 글을 보면 역시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훗날 세상이 바뀌었어도 그 신문사의 부장이 되고 중역도 되었다.

바로 이게 소위 수구좌파가 극단으로 간 생각의 추를 다시 내려오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극단적인 생각이 번성하는 것은 그것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을 탓하기에 앞서 이런 토양부터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닌가. 우파진영을 돌아본다. 거기에 아직도 유정회의 J의원과 C일보의 아무개 기자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 말하며,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인 세습 독재국가 북한을 흠모 찬양하는 또 한편을 바라본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극단적인 생각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의 극단이라는 것은 방향은 달라도 해악은 똑같은 법이다. 훗날 우리 후배들이 이러한 독선과 갈등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그 토양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일구어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