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 “시나리오 읽고 펑펑 울었다”
  • 하은정 우먼센스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06 09:00
  • 호수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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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생일》로 3년 만에 스크린 컴백한 전도연

고백하자면 기자는 영화 《무뢰한》(2015)을 보고 ‘뒤늦게’ 전도연에게 입덕했다. 전도연은 극 중 상처 위에 또 상처를 입고 사는 한물간 ‘술집 여자’를 연기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회색빛 무드인 이 영화에서 전도연은 전도연이 아니라 그저 ‘회색’ 같은 인물일 뿐이었다. 그 어떤 사물보다 그레이 톤을 내며 묵직하게 극을 이끌었는데, 그 연기가 무척이나 깊고 아름다웠다. 강렬했다. 그렇게 완성된 《무뢰한》은 지금도 기자가 꼽는 최고의 한국영화 중 하나다. 

이렇듯 전도연이기에 가능한 영화가 있다. 설경구와 함께한 신작 《생일》. 이 영화는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이종언 감독이 2015년부터 경기 안산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만난 세월호 유가족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극 중 전도연은 아들을 잃은 상처를 견디며 어린 딸과 살아가야 하는 여자 ‘순남’을 연기한다. 두 번의 거절과 긴 고민 끝에 선택한 작품이다. 

ⓒ 우먼센스 제공

두 번 출연을 고사했다고 들었다. 

“세월호 이야기라는 말을 듣고 되물었어요. ‘지금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게 괜찮아요?’ 하고요. 그렇게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펑펑 울었죠. 지인들도 대부분 걱정하며 출연을 반대했을 정도예요. 그도 그럴 것이 세월호 이야기는 여전히 과정 속에 있고,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니까요. 유가족들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도 중요한 문제였어요. 결국 세월호 영화였기 때문에 고사했고, 세월호 영화이기 때문에 용기 낼 수 있었어요.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게 결정적인 출연 이유였죠.”

지금 기분은 어떤가. 

“촬영이 끝난 뒤에 감독님과 진도 팽목항을 다녀왔어요. 매어놓은 리본이 다 빛바래졌더라고요. 씁쓸했어요. 우리 모두 잊지 말자고 했지만 어느 순간 희미해졌죠. 그걸 보는데 이 작품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홍보하고 있는 지금도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예요.”   

엄마 역할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고 들었다.  

“《밀양》(2007)에서 자식을 잃은 엄마를 연기한 이후 다시는 비슷한 역할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실제로 피하기도 했는데, 《생일》을 만난 거죠. 가깝게 지내는 한 지인이 ‘네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네가 했으면 좋겠다’고 용기를 주셨어요. ‘괜찮아, 한번 해 봐’라는 한마디가 제게 필요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도 어려운 역할이다. 어려운 영화에만 출연한다는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군말 없이 잘하니까(웃음). 물론 잘한다고 해서 즐기는 건 아니에요. 다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피하지 않는 거죠. 이번 역할, 어려웠어요. 끊임없이 의심을 해야 했거든요. 내가 ‘순남’을 표현하는 건지, 아니면 전도연으로 마음이 앞서는지 견제해야 했어요. 그래서 촬영하는 동안 끙끙 앓았어요.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심하게 몸 쓴 적 있어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대중은 제가 얼마나 열연했는지 이제 궁금해하지 않을 거예요. ‘어련히 잘했겠어’ 하는 거죠. 그럼에도 영화적 기대치만은 가져주셨으면 해요.”

이종언 감독과 인연이 남다르다고 들었다. 

“《밀양》을 찍을 때 이창동 감독님의 연출부였고, 당시 저를 ‘언니’, 전 ‘종언아’라고 부르는 사이였죠. 그랬는데 ‘저 이런 거 썼습니다. 언니와 하고 싶어요’라고 시나리오를 가져온 거예요. 시나리오를 읽고 바로 ‘감독님’이라고 불렀어요.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에게 힘이 돼 주고 싶었거든요. 저는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한 편인데, 시나리오가 좋으면 믿고 싶은 마음이 커요. 영화는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그게 좋은 작품 아닐까요? 그 시작을 나와 같이 했다는 게 정말 좋아요.”

설경구와의 호흡은 어땠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후 18년 만에 만났어요. 한데 어제 만난 사람처럼 너무 편안한 거예요. 기댈 수 있어서 좋았어요. 뭐랄까, 친정오빠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때는 오빠에게 남성미가 있다는 걸 몰랐는데, 멋있게 나이 드시는 것 같아요(웃음).”

설경구가 생각하는 전도연은 어떨까. 계속 봐온 사이지만 작품으로 호흡을 맞춘 건 오랜만이라 궁금하다.

“에너지가 더 깊어졌어요. 뭐랄까, 툭 툭 던지는 말도 다 맞는 ‘도사’ 같다고 해야 할까요(웃음). 둘 다 대화를 나누며 연기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조율도 연습도 일절 없었어요. 그냥 담담하게 했어요. 서로 믿고 의지했죠.”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일부러 슬픔에 빠져 있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름대로 제가 분위기 메이커였답니다. 적어도 (설)경구 오빠가 분위기 메이커일 리는 없잖아요(웃음). 오빠도 나름 뭔가를 하려고 했지만, 솔직히 유머코드가…. 그게 설경구식 유머였나 봐요. 하하.”  

흥행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도 궁금하다(전도연의 필모그래피에는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없다. 그만큼 쉽지 않은 영화를 선택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최근에 흥행이 저조해 내심 고민이 많았어요(웃음). 혹시 나 때문인가, 내 연기가 부담스럽나, 하고요.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진 않아요. 단,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출연한 영화는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이 있을까봐 우려되긴 하죠. 그럼에도 전 다양한 장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내 영화에 천만 관객이 들면 세상이 달라 보일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달라지진 않을 거 같아요. 천만 관객 배우라고 해서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바뀔 거 같지도 않고요. 물론 내 영화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봐 줬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긴 하죠.”

공백기 동안 어떻게 보냈나.  

“여배우로 화려한 삶을 살기도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저도 그냥 ‘무수리’예요. 아이 양말을 신기고 간식 챙겨주고 학교 보내고…. 보통의 일상을 살지요. 나이가 들면서 간혹 사는 게 무료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어요. 삶이 늘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그렇게 지내다가 문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심히 일하고 아이와 함께 잠들 수 있는 날들이 참 감사해요.”

여전히 건강한 외모다. 

“언젠가부터 체중계에 오르던 습관이 없어졌어요. 가방에 있던 거울도 사라졌지요. 운동 마니아로 알려졌지만 사실 최근 몇 년간은 운동에 집중하지도 않았지요. 그럼에도 조금 핼쑥해 보이는 게 제 일상이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인 것 같아요. 그래도 거울을 보면 뭔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에 슬플 때가 있지요. 방법이 없으니 그저 잘 받아들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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