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는 21세기 대한민국 공간 설계자였다”
  •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0 15:00
  • 호수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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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의 경제 바로읽기] 30년 후 미래 수요까지 감안해 대규모 투자 단행한 ‘노태우’

삶이 힘들어지면 과거의 순탄하고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이 과거를 떠올리면 회고와 추억이지만, 집단이 과거를 그리워하면 복고주의가 된다. 어느 사회나 현실의 어려움과 답답함이 커지면 좋았던 것 같은 시대를 떠올린다. 그때의 정신을 치켜세우고, 그때의 사람들과 기억들을 현실로 소환한다. 한국의 경우도 정치 성향에 따라 한쪽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다른 한쪽에서는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대상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거의 떠올리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존재가 있다. 6공화국 최초의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대통령이다. 12·12 군사반란을 획책하고, 3당 합당을 주도해 인위적으로 국민의 뜻을 왜곡한 존재로 간주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왼쪽, 오른쪽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은 매우 드물다. 설령 기억을 하는 사람들도 ‘물태우’라는 별명으로 별다른 색깔이 없던 무색무취했던 대통령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연 그럴까? 

6공화국이 출범한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라는 화려한 이벤트로 기억되지만 한편에서는 그동안 눌러놨던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5공화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고질적 병폐였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경제운영의 최우선 과제로 ‘물가안정’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인플레이션의 원인 중 하나로 ‘과잉투자’를 지목했고, 각종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투자 최소화 등 다양한 조치를 시행했다. 이를 통해 연간 수십 퍼센트에 이르는 물가상승률을 한 자리 숫자로 관리하는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현재의 문제를 미래로 떠넘긴 것에 불과했다. 

1990년 5월7일 노태우 대통령이 부동산 투기와 물가·수출 등 총체적 경제 난국 극복을 위해 국민의 협조를 호소하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90년 5월7일 노태우 대통령이 부동산 투기와 물가·수출 등 총체적 경제 난국 극복을 위해 국민의 협조를 호소하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한민국 인프라 한 단계 성장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자동차의 보급과 더불어 경부고속도로 등 주요 도로는 거의 매일 주차장을 방불케 했으며 국제공항 김포공항은 서울올림픽을 위해 확장공사를 했지만 곧 수용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3저 호황을 통해 투자 여력을 확보한 재벌의 공격적 투자로 전력수요가 급증했지만 전력공급은 불안하기만 했다. 주말 기차 승차권을 구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고 인천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지하철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여기에 베이비붐 세대의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주택 수요 폭증은 주택 가격과 전·월세 가격의 급등으로 이어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노태우 대통령과 당시 정부는 이런 총체적 난국이라 할 법한 상황에 맞서 과거 사용되던 수요 억제 수단들을 버리고 공급확대라는 정공법으로 맞섰다. 단순히 현재의 수요를 충족시킨다는 수준을 넘어 21세기의 미래 수요까지 감안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섬 사이의 갯벌을 메워 최대 1억 명을 이용할 수 있는 공항을 만들고,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해 서울과 연결하겠다는 계획은 어처구니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5조8000억원을 투자해 고속철도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21세기에나 다시 생각해 보라는 신문 사설의 비아냥 대상이 됐다. 전국의 주택 수가 640만 가구이던 상황에서 5년 만에 200만 호를 건설해 공급하겠다는 계획은 무모한 계획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과 정부는 향상된 경제력, 권위주의 시절에 형성된 관료의 추진능력을 극대화해 이 모든 것들을 밀어붙였다. 5대 신도시를 필두로 대량의 주택공급을 시행했다. 인천국제공항, 경부고속도로 확장, 서울지하철 5~8호선, 서울내부순환도로를 비롯한 수많은 교통시설을 착공했다. 산업적으로도 과거 소외됐던 서해안 지역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본격적으로 건설했다. 평택·아산·서산·당진 등의 자동차, 석유화학 산업단지들 모두 이 시기에 착공되거나 완공됐다.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2년 만에 다수의 복합화력발전소를 완공시키는 놀라운 추진력을 발휘했다. 이와 더불어 수도권의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도권매립지도 이 시기에 완공해 쓰레기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이러한 모든 결정이 불과 5년의 시간 동안 이뤄졌다.

물론 이러한 대규모 투자는 많은 문제점과 부작용을 가져왔다. 시멘트를 비롯한 각종 자재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부실공사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인건비 급등으로 인해 섬유를 비롯한 전통적 수출산업이 위축됐으며, 해외로의 사업장 이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시기의 집중적인 투자와 과감한 정책시행으로 대한민국의 각종 인프라는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으며, 21세기 현재까지 대부분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이때의 부작용과 혼란스러움이 너무 크게 기억에 남았을까? 이후 들어선 정부는 각종 개발에 대한 절차를 세분화하고 예비타당성조사로 대표되는 예산통제권을 강화했다. 환경영향평가를 비롯한 각종 절차들이 보완됐으며, 다양한 형태의 의견수렴을 통해 일방적인 계획수립과 사업진행을 막고자 노력했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으며 정부 역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월드컵과 관련한 대규모 투자, 2기 신도시, 세종시 및 혁신도시 건설, 4대강 사업 등 대규모 사업이 매 정권마다 이뤄졌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전반적인 투자 규모는 축소됐으며 사업기간 역시 길어졌다. 


지금은 실행해 완성하는 모습 보이지 않아

21세기 들어 2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1990년대 시행됐던 수많은 사업과 투자가 30년간의 수요증가에 대처할 수 있도록 잘 계획됐기 때문이다. 미래를 내다본 장기적 안목의 투자를 통해 우리 경제는 선진국 수준에 올라섰으며 국제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정작 이런 변화와 성장을 가능하게 한 토대를 구축한 인물과 그 시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의 5년은 사라진 시절처럼 간주되고 있다. 

2017년 이후 대한민국은 변화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나 정작 체감할 수 있는 가시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무엇을 하겠다는 정책과 계획은 난무하지만 책임지고 실행에 옮기고 완성시키는 정책결정권자도, 집단도 보이지 않는 것이 2019년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을 고민하고 맞서기보다는 추상적인 논의와 이념을 둘러싼 갈등과 회피하려는 경향만이 증폭되고 있다. 그 사이 30년 전 계획되고 만들어졌던 시설들은 낡아가고 용량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 누구도 미래를 위한 과감한 투자와 실천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의 해결책은 머나먼 어느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왔던 그 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태우라는 인물, 그리고 그 시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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