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日王)의 연호 아닌, 아베의 연호인가
  • 유재순 JP뉴스 대표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1 13:00
  • 호수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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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새 연호 ‘레이와’의 ‘영(令)’에 대해 열도 내에서도 해석 분분
헌법 개정하라는 총리의 명령이라는 위화감 제기도

4월1일 오전 11시41분, 평소보다 조금은 긴장한 듯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새로운 연호는 레이와입니다.” 스가 장관이 붓글씨로 쓴 ‘레이와(令和)’ 액자를 치켜든 순간, 동시에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와 찰나의 빛을 발하는 플래시만이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웠다.

오는 5월1일부터 공식 연호로 사용되는 ‘레이와’. 일본 정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레이와’는 일본 고전 《만엽집》에서 일부를 차용해 이 같은 연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과거의 경우, 대부분 중국 고전을 인용했는데 이번만큼은 일본 고전에서 발췌했다고 스가 장관뿐만 아니라 아베 총리까지 나서서 그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재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일본에서의 연호는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일컫는다. 비록 정치적인 영향력은 없지만 일본을 상징하는 국왕으로서 재임기간 동안을 한 단어로 응축해 부르는 것이 바로 이 연호다. 그래서 일본 국민들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을 식민지화했던 전범 히로히토 국왕에 대해서는 ‘쇼와(昭和) 시대’, 그 아들인 아키히토 현 국왕은 지금까지 ‘헤이세이(平成)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 만큼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들에게는 이 연호가 남달리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천황’이라고 떠받드는 신·구 국왕이 세대교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월1일 일본의 새로운 연호가 ‘레이와’로 결정되었다는 발표가 나온 후 연설하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아래 글자는 새 연호로 채택된 ‘레이와’ ⓒ AP 연합
4월1일 일본의 새로운 연호가 ‘레이와’로 결정되었다는 발표가 나온 후 연설하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아래 글자는 새 연호로 채택된 ‘레이와’ ⓒ AP 연합

 

아베 정권의 국수주의적 우경화 비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과거 새로운 연호는 국왕이 사망해 새로운 국왕이 즉위할 때 정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키히토 국왕의 생전에 새로운 연호가 정해지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아키히토 국왕이 오는 4월30일 퇴위하기 때문이다. 아키히토 국왕의 퇴위에 대해 일본 식자층에서는 꽤나 의미심장한 소문들이 나돌고 있다.

전례에 없는 국왕의 생전 퇴위 선언은, 평소 평화주의자인 아키히토 국왕이 아베 총리의 평화헌법 개정을 막으려고 한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아키히토 국왕이 퇴위 선언을 한 직후부터 반(反)아베파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일본 국민 대다수가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가 2019~20년 사이에 개정을 기정사실화하자 이를 조금이라도 늦춰보려고 아키히토 국왕이 퇴위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 아키히토 국왕이 퇴위하는 2019년에는 헌법 개정이 진짜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2020년에는 세계적 관심사인 도쿄올림픽이 있다. 바로 이 같은 상황을 노리고 아키히토 국왕이 전격적으로 퇴위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루히토 차기 국왕도 아버지의 의도를 이미 양해했다는 소문이 일본 내에 파다하다. 이는 곧 앞뒤 안 가리고 극단적인 우경화 정책으로 치닫는 아베 정권에 아키히토 국왕이 퇴위 결단을 내림으로써 급브레이크를 걸었다는 얘기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에 발표된 새 연호에 대해 많은 일본인은 물론 해외 언론들도 아베 정권의 국수주의적 우경화를 비판하고 나섰다. 일본 언론 여론조사에서는 62% 이상이 새 연호에 대해 “마음에 든다”고 대답했다지만, 실제로 기자가 만난 일본인들의 반응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아베 총리는 수차례의 TV방송과 기자회견에서, ‘레이와’의 레이(令)는 질서, 와(和)는 조화를 나타내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즉, 아름다운 조화를 일컫는 말이라고 부연설명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설명을 듣는 일본인들의 의구심은 커지고 있다. 

우선 집권여당인 자민당의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조차 4월1일, 새 연호가 발표되자마자 즉각 “위화감이 든다”고 부정적인 반응부터 나타냈다. 왠지 국민에게 명령하는 듯한 위화감이 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레이와’의 한자 영(令)이 아베 정부가 설명하는 ‘질서’ ‘아름다움’보다는 ‘명령’이라는 느낌이 먼저 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令이란 한자는 일본에서도 대개 명령(命令), 사령(司令), 징집령(徵集令) 등을 표현할 때 많이 쓰인다. 이번 연호에서처럼 令을 아름다움으로 해석해 사용하는 일본인은 지극히 드물다.      

5월1일 일본 국왕에 즉위할 나루히토 왕세자와 그의 부인 마사코 왕세자비 ⓒ EPA 연합
5월1일 일본 국왕에 즉위할 나루히토 왕세자와 그의 부인 마사코 왕세자비 ⓒ EPA 연합

 

해외 언론도 새 연호에 대해 부정적 시각

논픽션 작가 구보타 마사키(45)는 일본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아베 정부는 그 같은 의도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명령, 사령의 令이라는 글자를 연호에 사용하는 것이 어떤 연상을 불러일으킬지 일본 정부는 사전에 상상했을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인터넷상에서도 많은 이들이 아베 총리의 성향으로 봐서 “내 명령에 따라 화합하라”는 아베 독재를 나타내는 연호에 다름 아니다는 반응이 넘쳐나고 있다. 

냉철하게 아베 정부의 의도를 지적하는 일본인 기자도 있다. 재미 언론인 이이쓰카 마키코는 일본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새 연호에 대한 아베 정부의 숨겨진 의도를 꼬집었다. “질서나 조화는 일본이 옛날부터 변치 않고 중시하는, 세계로부터도 평가받아왔던 일본인들의 자부심인 가치관이다. 이 때문에 새 연호에서 새로움이나 차세대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아베 정부가 일본이 자부심을 가져왔던 가치관을, 세계의 질서와 조화가 상실되어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세계로 넓혀보겠다는 염원이 응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영국 텔레그래프지 또한 4월1일자 기사에서 “아키히토 천황의 퇴위는 평화의 시대를 마무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중략) 일본의 새 시대 연호를 정하는 데 전통을 깨고 중국 고전이 아닌 일본의 고전을 쓴다는 판단은 아베 보수정권의 국수주의적 경향과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새 연호에 대해 일본 국내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급증하자 일본 외무성이 4월4일 긴급 지령을 재외공관에 내려보냈다. 새 연호인 ‘레이와’가 ‘아름다운 조화’를 의미한다고 적극적으로 현지인들에게 설명하라는 공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정부가 의도해 표기하는 ‘레이와’는 영어로 ‘Beautiful Harmony’인데 영국 BBC를 비롯한 대부분의 해외 언론이 ‘레이와’를 ‘order and harmony(명령 혹은 지시와 조화)’ 혹은 command and harmony(명령과 조합)’로 번역해 표기하기 때문이다. 역시 문제의식을 가진 일본인이나 해외 언론의 시선은 같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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