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가 아내의 자리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08 18:00
  • 호수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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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역사학자 메릴린 옐롬의 역작 《아내의 역사》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2000년에 걸쳐 서구의 역사 속에서 아내의 위상과 의미가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흥미진진한 기록을 담고 있다. 아내가 남편과 분리된 독립적 존재라는 사실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판결이 프랑스 혁명기에 이뤄졌다 하니, 오랜 세월 남편의 재산이자 부속물로 간주돼 왔던 아내의 삶이 얼마나 신산(辛酸)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간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정치가의 아내라 해도 여염집 아내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1980년대 중반, 우리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넬슨 만델라도 아내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흑역사가 숨겨져 있음이 밝혀졌다. 그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그 딸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자신의 어머니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자신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를 누가 뭐라 해도 존경할 수는 없겠노라”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델라 자신도 젊은 시절의 방만했던 삶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노라는 말을 어딘가 남겼던 것 같다.

위대한 남편을 둔 아내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숨은 비밀을 건너뛰긴 어려울 것 같다. 미국에서 민권운동이 절정에 이를 즈음, FBI가 킹 목사의 사생활을 비밀리에 촬영한 동영상을 무기로 킹 목사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루머가 퍼지곤 했었다. 그때마다 그의 아내 코레타 스콧 킹은 남편을 향한 존경과 신뢰를 흔들림 없이 보여줬다. “우리 흑인들 사이에선 있을 수 있는 관행일 뿐, 나는 남편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는 아내의 조용한 고백 앞에서 루머는 의도했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이 불거졌을 때 그 누구보다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건 힐러리 클린턴이었고, 그때 그녀가 아내로서 흘렸던 ‘눈물’은 여전히 소환되고 있는 주제 중 하나다. 힐러리가 눈물 속에 담아냈던 분노와 회한, 좌절과 용서가 뒤범벅된 감정은 대중에게 진정성 있게 전달돼,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직면했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를 구사일생 구출해 주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요즘 들어 부쩍 정치가 아내의 모습을 보는 일이 잦아진 것 같다. 안희정 전(前) 충남지사의 아내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편은 불륜이었을 뿐 성범죄자는 아니다’는 취지의 글을 올려 소모적 논쟁을 다시 지핀 바 있고, 이재명 현(現) 경기지사의 아내 또한 불법 선거운동의 진원지로 의심받는 트위터 계정의 소유자로 지목되면서 두루 비판의 화살을 받기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치가의 아내라면 가능한 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美德)으로 간주되던 걸 생각해 보면, 세월 따라 정치가 아내의 자리 또한 바뀌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고가건물 매입 논란'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2019년3월29일 전격 사퇴했다. 김 대변인 청와대 출입기자단 대화방에 메시지를 올리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 연합뉴스
'고가건물 매입 논란'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2019년3월29일 전격 사퇴했다. 김 대변인 청와대 출입기자단 대화방에 메시지를 올리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 연합뉴스

한데 아주 최근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아내의 사연마저 등장했다. 부동산 투기 의혹을 잠재우지 못한 채 결국 ‘대통령의 입’이라는 막강한 자리를 물러나면서 김의겸 전(前) 청와대 대변인이 남긴 변명인즉 “나는 빌딩 구입 당시 아내가 은행에서 대출받은 사실을 몰랐었다. 나중에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고 했던 것 같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아내는 10억원이나 되는 거액을 남편과 일언반구 상의 없이 은행대출을 감행하는 간 큰 여자였단 말인가? 아니면 10억원 대출 같은 중차대한 이야기도 서로 소통하지 않는 무늬만 부부란 말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혹여 궁색한 거짓말에 옹색한 책임 회피는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래저래 세월에 휩쓸리며 아내의 위상이 상승 곡선을 그리긴 했지만, 정치가 아내란 쉽게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미묘하고도 오묘한 운명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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