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산불의 뒷면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5 09:00
  • 호수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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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불은 실로 무섭고 끔찍했다. 산 위의 나무들은 무기력하게 불길에 휩쓸렸고, 길 위에 선 덩치 큰 버스마저 순식간에 불타 녹아내렸다. 악마의 혀처럼 무섭게 날름거리는 불 앞에서 사람도 집도 한없이 허약해 보였다. TV에 비친 광경은 “시뻘건 불덩이가 펄쩍펄쩍 뛰어 순식간에 온 마을을 집어삼켰다”는 한 이재민의 표현 그대로였다. 화면을 통해 지켜보는 모습인데도 불의 무자비한 위력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강원도 일대를 뒤덮었던 산불은 어렵게 진화되었으나 화마가 남긴 상흔은 땅에도, 사람의 가슴에도 깊이 남았다. 그나마 정부가 신속히 대응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재산 손실은 물론이고 1000명이 넘는 이재민들을 짓누르는 시름의 무게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하다. 

4월5일 새벽 강원도 고성 산불이 번진 속초시 미시령로에서 강풍에 불씨들이 날리고 있다. ⓒ 연합뉴스
4월5일 새벽 강원도 고성 산불이 번진 속초시 미시령로에서 강풍에 불씨들이 날리고 있다. ⓒ 연합뉴스

안타까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처럼 엄청난 산불 앞에서 현지 주민이나, TV를 지켜보던 시민이나 모두 조바심으로 속이 타들어가던 그때 우리 사회 일부에서 나타난, 느슨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 때문이다.

산불이 시시각각 민가를 조여오던 그날 저녁, 생생한 현장 모습을 보기 위해 TV 채널을 부지런히 돌렸다. 평소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이 불거지면 특집 방송을 아낌없이 편성하던 종편 방송들은 예상과 달리 늘 해 오던 오락 방송들을 내보냈고, JTBC만이 유일하게 특보 방송을 하고 있었다. 이날 압권은 재난 주관 방송사인 KBS였다. 소방 당국이 오후 9시44분에 최고 대응 수준인 3단계를 발령했음에도 KBS의 첫 특보는 오후 10시53분부터 11시5분까지 12분간의 방송으로 그쳤다. 이후 정규 방송을 내보낸 뒤 11시25분에야 재난 방송 특보 체제로 전환했다. 그나마도 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은 빠져 있었다.

엇박자는 국회에서도 나왔다. 산불이 거세게 번지던 그 시각 진행된 국회 운영위원회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못 떠나게 붙잡아 두었다는 논란이 그것이다. 한국당 의원들은 국가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인 안보실장이 산불 때문에 부득이 자리를 떠야 한다는 위원장의 말에 “외교 참사가 더 크다”며 이석(離席)을 막았다. 나 원내대표는 “산불의 심각성을 몰랐다”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민생에 민감해야 할 국회의원의 발언으로는 부적절했다는 비난만 불렀다.

이 두 사례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재난·재해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내주는 단면들이다. 둔감이 깊어지면 불감(不感)이 된다. 이른바 ‘재난 불감증’이다. 산불은 지나갔지만 남겨진 피해는 막심하고 새겨야 할 교훈은 막중하다. 

산불 조심 기간인 5월15일까지 남은 기간은 길다. 방심할 수 없는 날이 앞으로도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이 시기, 우리가 반드시 먼저 태워 없앨 땔감은 그 ‘불감’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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