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의 마법…‘저녁 있는 삶’이 지닌 무한 경쟁력
  • 이미리 문토 대표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6 17:00
  • 호수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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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리의 요즘 애들 요즘 생각]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

반전 있는 사람이 좋다. 마치 영화 《패터슨》의 버스운전사 ‘패터슨’처럼. 버스를 운전하면서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사람 말이다. 패터슨처럼 일상의 순간을 온전히 누리며 살고 싶다고 떠올리다 패터슨이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일상은 단순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구간을 운전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해 같은 시간에 산책하고, 같은 시간에 맥줏집에 간다. 이렇게 지루한 삶에 시적인 순간들이 깃든다니! 하지만 곧 깨닫는 것이 있다. 일상의 낭만을 즐기고 무용한 것들에 마음껏 마음을 빼앗기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심리적·물리적 여유라는 사실이다.

종종 ‘소셜 살롱의 가장 큰 경쟁사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회사’라 답한다. 재미있는 것은 모두가 수긍한다는 점이다. 아마 누구나 생활 속에서 몸소 경험하는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소셜 살롱의 가장 큰 자랑은 높은 참여율이다. 더러 발생하는 불참 사유는 십중팔구 야근 때문이다. 심지어 때론 휴일까지도.

패터슨이 한국에서 운전대를 잡았으면 어땠을까. 화장실 갈 시간도 빠듯한 노동 조건으로 악명 높은 한국 운수산업의 종사자였다면, 혹은 업무시간도 모자라 퇴근 후까지 업무지시가 날아오는 단톡방을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였다면 말이다. 잠자기 바빠 순간을 오롯이 즐기며, 곁을 스쳐간 낯선 이들의 이야기를 시로 옮기는 낭만을 누리긴 어려웠을 거다. 

지난 3월31일부로 3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한 주 52시간제 계도기간이 끝났다. 내년부터는 50인에서 299인까지의 중소기업에도 적용된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온 ‘종일 노동의 시대’가 저물고 ‘저녁이 있는 삶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녹초 상태에서 아이디어 떠올릴 수 없어

2000년 세계 글로벌 브랜드 랭킹 1위는 코카콜라, 2위는 마이크로소프트(MS), 3위는 IBM, 4위는 인텔, 뒤를 이어 노키아와 GE가 있었다. 대부분 하드웨어 기반 제조업 회사다. 그러나 작년 MS와 코카콜라를 뺀 나머지 모든 회사들이 10위권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는 애플, 구글, 아마존 같은 소프트웨어 중심의 회사들이 차지했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패터슨이 빼곡히 시를 적어 두던 습작노트를 완전히 못 쓰게 되어 상심에 젖어 있을 때 누군가 그를 이렇게 위로한다. 빼곡히 적힌 페이지처럼 빼곡히 쌓는 것들이 가치를 보장하던 시대가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일하고, 아주 많은 것들을 축적하는 것이 그 자체로 성장을 담보하던 시대다. 지금은 아니다. 남과 다른 생각이, 새로운 상상과 경험이 더 큰 가치와 성장을 보장한다. 아마존이 그렇고, 애플이 그렇다.

주 52시간 제도의 정착은 우리 사회가 기존의 관성을 벗어나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선제적 조치다. 누구도 과로로 녹초가 된 상태에서 새로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없다. 패터슨 시의 어느 현자의 말처럼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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