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좌우 모두 아우른 임시정부가 국론 통합 모델”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6 14:00
  • 호수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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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인터뷰]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찬 전 국회의원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⑪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⑫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⑬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⑭ 이종찬 전 국회의원 

‘배에서 나리자(내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 중, 류치장(유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리상한 로인(이상한 노인).’

1932년 11월17일 중앙일보 사회면에 3단짜리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누가 그리고 왜 자살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은 사건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소문은 얼마 못 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비보를 들은 우국지사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우당은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조국 독립을 외치다 순국해서가 아니다. 사상부터가 남달라서다. 

우당 가계의 뿌리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조선 중기 문신 백사 이항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당의 10대조가 백사 이항복이다. 백사 이래 우당의 부친 이유승에 이르기까지 그의 집안에선 정승, 판서, 참판이 대를 이어 나왔다. ‘삼한갑족(三韓甲族·예로부터 대대로 명망이 높은 집안)’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우당의 형제 7명 중 6명은 “빼앗긴 나라에선 한시도 살 수 없다”며 가산을 모두 정리해 만주로 건너갔다. 일곱 형제 중 무려 여섯 형제가 뜻을 같이했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그렇게 만주로 가서는 삼원보에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결과적으로 우당은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아 숨졌지만 형제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끝내 광복의 기틀을 마련했다. 바로 아래 동생인 이시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초대 부통령에 올랐다.

ⓒ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임준선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 위해 노력 중

이종찬 전 국회의원은 우당의 손자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 전 의원의 사촌동생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과 함께 귀국한 이 전 의원은 육군사관학교(16기)를 졸업한 뒤 1965년 현역 장교 신분으로 중앙정보부에 공채 1기로 들어가 총무국장과 기획조정실장을 지냈다. 1980년 5공화국 출범과 함께 민정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서 11대부터 14대까지 내리 당선됐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대권 도전에 힘을 보탰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훗날 ‘국민의 정부’ 초대 국정원장에 올랐다.

이 전 의원의 부친과 조부가 격동기 근대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면, 이 전 의원은 5, 6공화국을 거쳐 문민정부, 국민의정부까지 현대사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국정원장을 마지막으로 정계를 떠난 이 전 의원은 조부의 뜻을 이어 우당기념관 관장, 우당장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은 ‘필생의 업’으로 생각하는 일이다. 상해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한 주 앞둔 4월3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 만난 자리에서 이 전 의원은 “조국 독립이라는 목표 아래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진 통합의 정신이 우당이 꿈꾼 세상이자, 임시정부의 혼”이라고 강조했다.

그간 해 오신 우당기념사업회 활동이 궁금합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기념사업회 일을 시작한 게 30~40년 됐습니다. 그 전까지 우당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었어요. 제 조부여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 자체가 지하에 묻혔기 때문이죠. 아나키즘 운동에 대해 국민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했는데 그건 완벽한 오역입니다.”

그렇다면 아나키즘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무엇입니까.

“아나키즘은 거대 권력을 거부하는 겁니다. 모든 국민들이 자율적 의사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거지요. 그렇기에 지방분권을 더 중요시합니다. 협동조합 운동도 고취시켰지요. 그런데 이분들이 왜 항일투쟁을 했느냐, 아나키즘은 폭력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지요. 이들에게 타도 대상은 일본 국민이 아닙니다. 이를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아나키즘을 잘 모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지방분권을 통해 권력을 횡적으로 위임하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이 줍니다. 지방분권이 바로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꿈꾼 세상이에요. 지금의 시대정신과 맞습니다.”

우당이 꿈꾼 국가의 모습은 무엇이었나요.

“고종이 있을 때까진 입헌군주제를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그런데 고종 황제께서 승하하신 뒤엔 완전한 민주공화제로 바꿨어요. 그래서 초대의정원 의원이 되신 겁니다.”

4월11일이면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됩니다.

“저는 상해임시정부라는 말을 안 써요. 상해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토크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가 합쳐져 9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들어졌거든요. 임시정부 정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민주공화제’예요. 헌장 1조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10조가 아주 혁신적이에요. ‘국토가 회복된 후 1년 이내 국회를 소집한다’죠. 오늘날 국회라는 말이 거기서 생긴 겁니다.”


고종 황제 승하 전까지 입헌군주제 꿈꿔

의정안이 굉장히 혁신적이었네요. 이런 저력이 어디서 나왔나요.

“처음 읽고 나도 놀랐어요. 당시 임시의정원에 29분이 모였는데, 평균 연령이 36살이었습니다. 그중 우당이 가장 나이가 많은 53세였어요. 제일 젊은 사람이 최근우씨로 23살이에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제일 먼저 주창한 사람인 신석우씨도 당시 26살이었죠. 결국 임시정부는 청년들이 만든 조직입니다. 우린 그걸 자랑스러워해야 해요.”

당시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이런 혁신적인 생각을 했을까요.

“석주 이상룡 선생이 쓴 《석주유고》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오늘은 장 자크 루소에 대해서 읽었다’ ‘오늘은 헤겔에 대해 읽었다’ ‘오늘은 스피노자를 읽었다’. 석주 선생 후손에게 물어보니, 제자들이 북경을 다녀오면서 책을 사와 선물로 줬다는 겁니다. 종합해 보면 당시 우리 선조들은 서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관심 깊게 본 겁니다.”

우당이 제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강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희망했는데 아나키스트들은 ‘그건 독재다’라고 반대한 겁니다. 그래서 반(反)이승만 노선에 서게 됐지요. 타협하지 않았어요. 정화암, 유림 선생 등이 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한 겁니다.”

우당의 정신이 우리 한국 사회에 어떤 울림이 됐으면 하시나요.

“우당은 모든 면에 있어 너무 앞서 나간 분입니다. 고종 황제 망명도 앞서 나간 거예요. 지도자는 시대에 반 발자국만 앞서 나가야 하는데 그분은 한 발자국을 앞서 나간 분입니다. 결국은 불행하게 돌아가셨지만, 그것도 가치 있는 일이었어요. 어쨌든 그분은 거대한 중앙집권을 거부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복건성(푸젠성)에 작은 마을을 만들려 하다 실패했습니다. 이론으로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한 것, 전 재산을 모두 처분해 조국 독립을 위해 실천한 것. 그분은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그런 행동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당을 비롯해 구한말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적 뿌리는 ‘양명학’에서 출발한다. 우당과 뜻을 같이했던 경북 안동의 석주(이상룡 선생)는 망명 일기인 《서사록》에서 양명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대개 양명학은 비록 퇴계 문도의 배척을 당했으나 그 법문이 적절하고 간요하여 속된 학자들이 감히 의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양명학은 중국 왕수인이 명대에 집대성한 신개념의 유학이다. 사대부의 이익을 절대시하는 성리학과 양명학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달랐다. 나라의 국민은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며, 이런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도 서로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문헌엔 우당이 노비 등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경어를 썼으며 적서(嫡庶)의 차별을 없앴다. 재혼을 장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전국 팔도의 사대부들을 만주 유하현에 집단 망명시켜 만든 횡도촌(橫道村)은 지금으로 치면 적게는 협동조합, 크게는 지방자치조직이다. 상당수 양반 사대부들이 민족주의 노선으로 간 것과 달리 우당이 사회주의 사상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아나키즘을 선택한 것은 당시로선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 활동한 우당 이회영 ⓒ 우당기념관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 활동한 우당 이회영 ⓒ 우당기념관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국부는 한 명 아냐

우당은 당시 성리학으로부터 이단이라고 불린 ‘앙명학’을 공부하셨는데 이것도 연관성이 있을까요.

“맞습니다. 성리학이 너무 조선왕조를 이상스럽게 만드니 그렇게 된 겁니다. 영조 때부터 위정척사파들이 임금을 꼼짝 못하게 하지 않았나요. 성리학이 극단화돼 나온 것이 위정척사 아닙니까. 이걸 깨지 못하면 개화도 어렵고, 부국강병도 어렵다고 본 게 당시 양명학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당도 그 생각을 따른 거지요. 양명학은 성리학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서 시작된 겁니다.”

정부가 상해임시정부에만 의미 부여를 하는 게 불편하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역사를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 순으로 봅니다. 그래서 건국절 제정을 반대하지요. 건국은 반만년 전에 했어요. 기미독립선언서에 ‘조선건국 4252년’이라고 돼 있지 않습니까. 건국을 이미 반만년 전에 했단 뜻입니다. 대한제국이 맺은 일본과의 합방조약은 무효이기에 해방 후 건국절은 의미가 없어요. 1948년 건국했다고 말하면 굉장한 혼란에 빠집니다. 이렇게 되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무국적자가 되는 겁니다. 그 전엔 나라가 없어 일본 신민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위안부 할머니 문제에 논리적으로 신민이 신민을 괴롭혔는데 왜 그게 문제가 되느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분명 나라는 있었어요. 정부가 없었을 뿐이지.”

이승만 대통령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저는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봅니다. 그렇기에 국부입니다. 다만 국부를 민주주의 체제에서 한 명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진보진영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반대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엔 이승만 대통령부터해서 모두가 들어와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에겐 공도 있고 과도 있습니다. 공 7, 과 3이지요. 4·19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과라고 봐야겠지요.”

최근 국가보훈처가 약산 김원봉에 대한 서훈을 준비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 기준으로 볼 때 미흡하기 때문에 서훈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특별히 할 필요는 없지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있어 시원치 않은 장관이라도 장관직 명단에 올랐으니 서훈하기엔 문제가 있지요. 하지만 임시정부에 참여한 그분의 공적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김원봉 선생은 해방 후 남쪽에 임정요인 자격으로 귀국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장택상, 노덕술 같은 친일 경찰들이 날뛰는 걸 보고 ‘해방이 안 됐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북이 실질적으로 해방됐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승만 정부가 일제 잔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아쉽지요. 그때 반민특위가 제대로 가동됐어야 합니다. 그게 제대로 못 된 게 이승만 대통령의 과인 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꿈꿨던 정신은 뭘까요.

“자주독립, 민주공화, 통합입니다. 혹자는 통합이라는 개념에 공화가 포함돼 있다고 보는데요. 모든 세력이 함께 조국 독립을 만든다는 게 중요한 정신입니다. 저는 미군 철수를 반대합니다. 그렇다고 미군 철수를 반대한다고 해서 자주국방이 약화돼선 안 됩니다.”

이종찬 전 의원이 2월2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전 ‘그날이 오면’에 참석해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종찬 전 의원이 2월21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전 ‘그날이 오면’에 참석해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 연합뉴스

14대 총선에서 노무현·이명박 대통령 경쟁

이 전 의원은 국정원장을 마지막으로 정계를 떠나 초야에 묻혔다. 그렇지만 그동안 그가 걸어온 정치 역정은 격동의 연속이었다. 이 전 의원은 중앙정보부 시절 박정희 대통령, 민정당 의원 시절엔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국정원장 시절엔 김대중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다. 김영삼 대통령과는 대권을 놓고 경쟁을 벌여 껄끄러운 관계가 이어져야 했다.
1996년 치러진 15대 총선 때는 훗날 대권을 거머쥔 노무현, 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 밖에도

지역구가 정치1번지인 서울 종로였던 탓에 이 전 의원은 12대 총선에선 신한민주당으로 출마한 야권의 거물 이민우 총재, 13대 때는 상도동계의 핵심인 김명윤 민추협 부의장, 14대 때는 동교동계 차세대 주자인 김경재 후보를 눌러 일찌감치 차세대 대권후보로 부상했다. 민정당에서 정치 생활을 했지만, 이 전 의원은 과거 정계에 있을 때 바른 소리 잘하는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전 의원은 ‘개혁적 보수’의 원류라고 할 만하다. 이 전 의원은 조만간 광복회장 선거에 출마할 계획이다. 그는 광복회를 국가원로그룹의 중심으로 키운다는 복안이다. 아울러 2021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들어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정파와 이념을 초월한, 이승만부터 김원봉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독립운동 기념 시설로 짓겠다는 목표다.

요즘 정치를 보면 여야 간 대화가 단절됐다는 느낌입니다.

“맞아요. 대화가 없어요. 예전엔 여야 원내총무가 모여 대화를 자주 나눴는데…. 누가 그럽디다. 경제 양극화보다 정치 양극화가 심각하다고. 예컨대 국회 특별활동비는 삭감하지 않는 게 좋아요. 만나려면 돈이 들거든요. 특별활동비로 그런 걸 대줘야 해요. 대화의 광장에 쓰는 예산만큼은 지원해 줘야죠.”

왜 정치가 이렇게 됐을까요.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이 커요. 노무현 대통령을 그렇게 안 했어야 옳아요. 너무 극단적으로 몰지 말았어야 했죠. 그렇다고 해서 노 대통령이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대통령을 망신 줘서 결국은 자살토록 만든 게 정치를 극단화시킨 단초가 됐어요. 전직 대통령을 우대하고 필요한 사항은 물어보면서 할 수도 있었거든요. 이게 자꾸 반복될까봐 걱정됩니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 활동은 어떻게 보십니까. 과거 문민정부 때도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5공 청문회도 하고 다 했어요. 그래도 정치적 여유가 있었죠. 반면 지금은 각박해요. 적폐청산도 대통령이 방침을 세웠으면 야당과 대화하면서 충고를 듣는 룸(방)이 있어야 해요. 지금은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간다’며 극단적 상황으로 몰고 있어요. 이건 민주주의 정치에서 상당한 마이너스예요.”

전임 정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요.

“탄핵으로 세워진 정부지만, 그건 그거대로 하고 새로운 장을 열었어야 했어요.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보수가 건강해야 진보가 긴장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어떻게 보십니까.

“장점이 있어요. 굉장히 본인 스스로를 정화하려고 조심하는 거 같습니다. 퇴임 이후 욕먹는 대통령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다른 대통령은 권한 행사를 막 했거든요. 그래서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소릴 들은 겁니다. 다만 참모진은 아쉬워요. 현실은 4, 이상은 6이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이상적이에요.”

보수진영의 단일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보수가 건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보도 긴장해요. 지금 자유한국당의 보수는 잘못된 것을 청산하지 않는 보수입니다. 과감히 버리지 못해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한마디도 못 하고 아첨만 한 사람은 물러나야죠. 박 대통령이 듣든 말든 시도를 한 사람들이 진정한 보수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건전한 보수 세력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보수 매파와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적으로 그 세력을 제거할 수 없으니, 함께 가는 겁니다. 지금 태극기 세력 내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연민의 정을 가진 세력과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실망한 그룹이 혼재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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