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천재’ 김승현 “전격 은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21 15:00
  • 호수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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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농구 천재’로 KBL 무대 휘저었던 김승현
“내가 추진했던 트레이드 성사됐다면 지금도 선수생활 하고 있을 지도…”

2000년대 최고의 농구 스타였던 ‘천재 가드’ 김승현. 현란한 드리블과 허를 찌르는 패스, 탁월한 경기 조율 능력 등으로 단숨에 코트를 접수한 그는 프로 데뷔 해에 신인왕·MVP를 동시에 석권한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다. 특히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4쿼터 막판 투입돼 가로채기와 어시스트로 금메달 획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면은 압권이었다. 2014년 은퇴 후 농구 코트와 가장 가까운 중계석에서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인 김승현을 만났다.

ⓒ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임준선

오랜만의 인터뷰인데 얼굴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겠다. 어느새 마흔두 살에 접어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보톡스 시술 받았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즐겁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한 부분이 표정에 나타나는 것 같다.”

은퇴 후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처음에는 살짝 목소리가 불안정해 보였는데 지금은 경기를 보는 시각과 경기 장면을 설명하고 잡아내는 부분이 경지에 이른 느낌이 든다.

“과찬이다. 맨 처음 마이크를 잡고 중계석에 앉았을 때는 실수 연발이었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 상황과 동떨어진 중저음의 목소리가 거슬린다는 지적도 많았고, 방송 화면과 해설이 맞지 않아 고전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유능한 캐스터들의 도움으로 방송용 언어와 말하는 스킬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어떤 일이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시간과 경험이 녹아들면서 해설도 조금씩 편해지는 느낌을 받는 걸 보면 말이다.” 

해설의 매력이 무엇인가.

“넓은 시야의 확보. 선수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농구는 흐름이 중요한데 중계석에서 코트를 보니 그 흐름과 빈틈이 보이더라.”

2014년 5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오리온스 시절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다 이면계약서 파동으로 징계를 먹고 구단과의 민사소송이 이어졌다. 이후 삼성 썬더스로 이적했지만 이번에는 김동광 감독과 부딪히며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결국 아쉬움을 가득 안고 현역 시절을 마감했는데 지금 그 상황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나.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은퇴 당시 내 몸 상태가 굉장히 좋았다는 사실이다. 삼성에서 김동광 감독님과 부딪혔던 이유는 서로 맞지 않는 농구 스타일 때문이었다. 감독님 입장에서는 자신의 농구 색깔과 내가 하는 플레이가 어긋난다고 생각해서인지 나를 코트보다는 벤치에 앉혀두는 일이 더 많았다. 2013~14 시즌에 성적 부진으로 감독님이 자진 사퇴하셨고 이후 김상식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는데 그때부터 출전 기회가 늘어나면서 승률이 5할을 넘어섰다. 코트에 나서는 기회가 많을수록 경기력이 살아나는 걸 확인했고, 내가 아직 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여전히 내 왼손을 막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결혼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 아직까지 선수로 뛰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승현은 2018년 5월, 연기자로 활동하는 한정원씨와 결혼했다. 

2009년 1월8일 2008~09 프로농구 서울 삼성과 대구 동양오리온스의 경기에서 드리블하는 김승현 ⓒ 연합뉴스
2009년 1월8일 2008~09 프로농구 서울 삼성과 대구 동양오리온스의 경기에서 드리블하는 김승현 ⓒ 연합뉴스

그런데 그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발표했다. 지금의 이상민이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선수 김승현과 계속 같이 가고 싶어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이)상민이 형이 감독이 되면서 내게 1년만 더 같이하자고 부탁했다. 그런데 형의 바람과 달리 구단 측에서는 나와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상민이 형이 굉장히 미안해하더라. 사실 나도 고민 많이 했었다. 자유계약 시장에 나가면 분명 다른 팀의 러브콜을 받을 텐데 굳이 팀을 옮겨 다른 선수들과 새롭게 호흡을 맞추고, 어린 선수들의 설 자리를 빼앗아야 하나 싶더라. 그래서 과감히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은퇴한 걸 후회한 적이 있었나. 

“물론 후회한 적은 있었지만 후회보다 은퇴 후 ‘괜찮았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가 80%는 될 것이다. 나보다 더 빨리 은퇴한 선배들도 있기 때문에 내가 너무 이른 나이에 은퇴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농구 커리어에서 가장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감독님 스타일에 맞추지 못한 게 후회된다. 내 색깔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내가 하는 농구가 맞다고 생각했고, 또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데 감독님이 나를 믿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항심이 생겼던 것 같다. 김동광 감독님은 농구의 기본을 중요시하는 타입이었고 나는 화려한 플레이를 선호하는 편이라 자존심으로 대립했으니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운동 세계에서는 선수가 감독의 스타일에 맞추는 게 일반적인데 감독의 색깔이 아닌 자신이 색깔을 고집했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한번은 감독님한테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시켜 달라고 부탁드렸다. 감독님과 내 스타일이 맞지 않는 듯하니 내가 팀을 떠나겠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감독님도 내가 원하는 팀이 있다면 직접 알아보라고 하시더라.”

선수가 직접 팀을 알아본다고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적은 구단과 구단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감독님이 직접 알아보라고 하시니 알아봤을 뿐이다. 당시 모 구단과 비밀 트레이드를 진행했었고 그 구단 측에서는 그룹 오너한테까지 결재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삼성 구단 측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트레이드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지금도 가장 후회되는 게 그 트레이드다. 만약 그때 다른 팀으로 옮겼다면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몸이 아프지 않아도 출전할 기회가 없었고, 팀 성적은 바닥을 치고 있고, 팬들은 내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었고….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실 아무리 감독이 팀을 알아보라고 했다 해도 이미 마음이 떠난 선수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감독은 흔치 않을 것이다.

“감독은 선수의 단점이 아닌 장점을 부각시켜줘야 한다고 본다. 내가 잘하는 농구가 있는데 그걸 못 하게 만드는 게 감독의 역할은 아니다.”

세상은 돌고 돈다. 김동광 전 감독과 김승현은 지금 KBL 경기본부장과 방송사 해설위원으로 코트 밖에서 만나고 있다. 

농구선수 김승현을 떠올리면 결코 평범한 선수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했고, 자기 색깔이 두드러진 선수라 신인 때는 프로에서 생존하기 어려울 거라는 시각이 많았다. 

“신인 때 대구 동양에는 김병철·전희철 등 하늘 같은 선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드를 맡고 있는 나로서는 형들이 공을 달라고 하면 패스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거의 공을 주지 않고 외국인 선수에게 공을 넘겼다. 경기하다 막히면 한 번씩 패스했을 정도다. 당시 신인이었지만 나는 코트에서만큼은 내가 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트 밖에서는 무조건 고개를 숙였다. 내가 패스 안 해 준다고 기분 나빠 하는 형들이 있으면 ‘형, 소주 한잔 사 주세요’ 하며 달라붙었다(웃음). 형들이랑 부딪힌 적이 거의 없었다. 외국인 선수도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경우 공을 패스하지 않았다. 통역 불러다가 ‘집에 가고 싶냐’고 말한 적도 있었다. 일대일 못하는 선수한테 패스 안 할 거라고 말했더니 그다음부터는 최선을 다하더라.”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다. 한국 농구에서 포인트 가드의 계보가 있다. 강동희-이상민-김승현인데, 특히 농구 팬들 사이에서 강동희와 김승현 중 누가 더 최고의 포인트 가드냐고 설전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강)동희 형은 나보다 슛이 훨씬 좋았다. 스피드와 패스는 내가 좀 더 앞섰고. 경기 운영 능력, 창의적인 플레이는 비슷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희 형의 플레이를 보고 성장했다. 그런 점에서 서로의 강점이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희 형을 상대팀으로 만났을 때 형이 날 피했다. 내가 하도 들이대니까 제발 좀 떨어져서 경기하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때 가장 재미있게 농구했던 것 같다.”

프로농구의 인기와 관심이 예전만 못한 게 사실이다. 농구인으로서 안타까움이 클 것 같은데.

“이 문제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한꺼번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코트에서 뛰는 선수들의 신체 조건은 굉장히 좋아졌다. 그런데 기량은 떨어지고 체력도 뒷받침되지 못한다. 내가 선수 생활할 때는 40분 풀타임을 뛰면서 일주일에 3경기를 소화했다. 지금은 한 경기에 20분만 소화해도 체력 저하를 호소한다. 신체 조건이 월등히 좋아졌음에도 체력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잘못된 방법으로 농구를 배웠기 때문이다. 유소년 시절의 농구는 창의적인 플레이를 지향하고 기본기에 충실하면서 개인의 기량을 발전시켜야 하는데 감독, 코치가 성적에 매달리다보니 선수들의 기량은 점점 퇴보되는 것이다. 최근 농구계에 스킬 트레이닝 열풍이 일었다. 그러나 기본기와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스킬 트레이닝은 ‘겉멋’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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