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희 “文정부, 차기 정권이 북핵 협상 과실 따 먹게 해 줘야”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4.24 09:00
  • 호수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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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인터뷰] ‘자유주의자’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⑪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⑫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⑬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⑭이종찬 전 국회의원 ⑮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의식은 야(野)에 있으나, 현실은 여(與)에 있다. 꿈은 진보에 있었으나,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 술 취해 집에 돌아가면 3만 권의 책이 있었다. 법과대학 동기인 아내와 데모하는 딸의 빈방이 있었다.”

시인 고은은 자신의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 단어는 음절마다 대칭되지만, 묘하게 호응한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 술과 책, 대학 동기인 아내와 데모하는 딸.

4선 의원과 장관을 지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의 이야기다. 우리 정치사에서 남 전 장관은 좀 특이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력부터가 남다르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 철학에 빠져, 2학년을 마치고 다시 시험을 봐 법대로 진로를 바꿨다. 그렇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나 싶더니 이승만 정부 때 이 대통령 양아들(이강석)이 부정 편입했다는 이유로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공직엔 얼씬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끝에 선택한 직업이 바로 신문기자다. 1958년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4년 뒤 조선일보로 옮겨 문화부장·정치부장·편집부국장·논설위원을 지냈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진 서울신문에서 편집국장, 이사, 주필로 일했다. 꼬박 20년간 ‘언론사 밥’을 먹고는 국회의원으로 변신, 서울 강서구에서 내리 당선됐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인 1993년엔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 행정 경험도 쌓았다. 그랬던 그가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난 것은 64세 때다. 인생의 본격적인 행로는 이때부터였다.   

ⓒ 시사저널 고성준
ⓒ 시사저널 고성준

민정당 의원이면서도 DJ 측근과 사돈 맺어 

정치인 남재희의 격동 같은 인생 역정은 현재진행형이다.  “20대에 왼쪽 가슴이 뜨겁지 않은 사람은 바보지만, 50대 넘어 왼쪽 가슴이 뜨거운 사람 역시 바보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모름지기 나이를 먹을수록 사고가 보수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남 전 장관의 인생궤적은 달랐다. 정반대였다. 

남 전 장관은 평생 여당 의원만 했다. 같은 시기 그의 두 딸은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골수 운동권’ 학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여당 의원으론 엄청난 결격사유다. 더군다나 둘째 딸은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이던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 예춘호 전 민추협 부의장 아들과 결혼했다. 주변에서 걱정 어린 눈으로 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는 ‘자유주의자’를 꿈꾼 남 전 장관의 또 다른 얼굴이다. 

정계 은퇴 이후 남 전 장관의 행보는 진보 쪽에 가깝다. 가장 최근에 쓴 책 《진보 열전》(2016년)이 이런 성향을 잘 말해 준다. 평소 남 전 장관은 진보정당이 10%가량 표를 얻으면 대한민국 정치가 바뀐다고 주장해 왔다. 다당제는 오랜 시간 그가 꿈꿔온 정치 이상향이다. 그러기 위해선 비례대표제 확대가 중요하다. 그래야만 의회가 다양한 생각들로 채워지며, 정당의 이념성도 넓어진다고 본다.  

“시사저널이 오랜만에 무거운 주제로 기획하셨네.” 남 전 장관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돌아온 첫마디였다. “시사저널을 만든 과거 박권상 선배(전 시사저널 편집인)도 이런 기획을 원하셨지. 그런데 나와는 어떤 주제로 이야기 나눌 거요?” 기자가 잠시 머뭇거리자 그는 “그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해 봅시다. 몇 시간도 좋아. 그날 다 못 하면 또 만나서 이야기하지 뭐. 근데 난 휴대폰이 없어. 연락하려면 내 안사람한테 전화해요.” 그와의 인터뷰는 1974년 총무를 지낸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14층 관훈클럽에서 3월30일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본인의 정치 성향이 진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보수라고 생각하시나요.

“학창 시절 서울대 정치학과에 민병태 교수라는 분이 계셨어요. 이분이 영국의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키를 한국에 처음 소개했는데, 라스키는 영국 노동당의 이론가예요. 영국 노동당에서 중앙집행위원장까지 했지. 이 사람이 내세운 게 ‘페이비언 소셜리즘’(Fabian Socialism·점진적 사회주의)이었어요. 민 교수에게 감동받아 1953년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이 ‘신진회’라는 서클(동아리)을 만들었지요. 그게 서울 법대로 전파돼 만들어진 게 ‘신조회’였고. 그때 영향받은 사람들이 대거 신문기자가 됐어요.”

주변에서 보수주의자냐, 진보주의자냐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나요.

“진보 쪽에 기울지.”

국회에 계실 때도 진보 성향이었나요.

“물론…. 노골적이지만은 않았지만 진보였어요.”

촛불운동이 정치권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4·19 학생혁명 때도 주체는 성립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혼란이 온 거지. 학생혁명의 목표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있었지만 통일운동 성격도 있었어요. 경제발전도 있었고…. 그런데 그 뒤를 이은 장면 정권이 이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다 보니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겁니다. 개인적으로 ‘촛불’을 레볼루션(혁명)으로 보긴 힘들고, 리포머티브 무브먼트(Reformative Movement·개혁적 운동)로 봐야 하지 않을까.”

현 정부가 장관님 생각대로 잘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반쯤은 했다고 봐요. 문제는 경기예요. 물론 지금 경제는 정부가 주도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전두환 정권 이후 우리 경제는 민간 주도 경제거든요.”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 하락도 경제 때문으로 보십니까. 

“그렇죠. 다만 제가 얼마 전 한 매체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적폐청산은 이제 그만하자.’ 또 하나 중요한 건 남북관계예요. 남북관계는 단기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6·25 때는 처참한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휴전 협상하는 데 3년 걸렸어요. 지금 경제제재는 그때보다 덜한 겁니다. 핵 폐기 협상은 최소 3년 갈 겁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이를 너무 단기로 보고 있어요. 협상의 과실은 차기 정권이 따 먹을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1993년 12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남재희 노동부 장관(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93년 12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남재희 노동부 장관(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두 대통령 감옥 보냈으니 적폐청산 그만하자”

적폐청산을 그만해야 할 이유는 무언가요.

“혁명이 아니니까. 박근혜·이명박 대통령 잡아넣고, 대법원장도 잡아넣었으면 반쯤 한 거죠. 장면 정권은 그마저도 못 했거든요.”

주류인 전대협 세대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임수경이 평양 갔다 올 때 활동한 그 세대 말이죠? 아마도 시대를 못 따라가는 잔재가 남아 있을 겁니다. 냉전적 사고에 빠졌을 때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한 항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과의 갭(간격)이 있을 거라고 봐요.” 

청와대 대변인이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아 사퇴했습니다. 진보세력마저 도덕적 불감증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이는데요.

“모럴(도덕) 형성이 덜 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서양은 종교적인 뒷받침이 있어서 그런지 모럴을 강조해요. 반면 우리는 유교 선비 정신은 없어졌고 민주화된 다음엔 서양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도 없어요.”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진보도 부패로 망하는 거 아닙니까. 

“예전에 모 종편에 나가 ‘리영희는 좀 날이 넘어선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리영희 교수와 남 전 장관은 조선일보에서 함께 근무한 동료다). 리영희의 영향이 집권 세력에 잔재로 남아 있는 거 같아요.”

날이 넘어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진보성이 조금 지나쳤다는 거지요. 리영희가 월남전 반대 때부터 날리기 시작했는데요. 월남전을 호찌민의 민족해방운동으로만 볼 순 없어요. 공산체제와 자본주의체제가 겹쳐진 거예요. 그런데 호찌민을 좋은 쪽으로만 보니, 왜곡되고 결국 ‘공산주의는 좋다’는 걸로 결론 난 거 아니겠습니까.”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는 현 집권 세력의 필독서죠.

“문재인 대통령도 그 책을 읽고 감동받았다고 하지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인수위 역할인 ‘국정자문기획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마지막 모임에 저와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김호기 연세대 교수, 최영애 현 국가인권위원장이 초청됐는데, 제가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첫째, 원자력 발전을 없앤다고 했는데 중간쯤 가자. 약간 축소하되 따라가자.’ 그다음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 앞 정부 서울청사로) 옮긴다고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세 번째로 ‘리영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너무 갈아 날이 넘어서면 칼을 못 쓰는 법이에요.” 


“文 리더십? 아직 잘 모르겠다”

언론사에서도, 정계에서도 그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했다. 그랬기에 정치를 떠날 때도 미련이 없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던 김대중 정부가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대학에서, 언론계에서, 정계에서 그는 여러 대통령과 조우했다.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남 전 장관은 손수 원고지에 쓴 글 한 편을 시사저널에 선물로 줬다. 제목은 ‘삼김 일노의 회상’이다. 글에서 그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김대중-각고면려의 입지, 김영삼-대단한 투지의 돌파력, 김종필-마지막 한계에 부닥친 로맨티스트, 노무현-진정성으로 일관한 드문 지도자.’

그의 눈에 비친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일까. 돌아온 대답은 유보적이다. 

“아직은 모르겠어. 잘하시겠지.”

문재인 정부 역시 인재풀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더불어민주당이나 자유한국당이나 이념집단이 아니잖습니까. 뚜렷한 소신이 있어 간 게 아니잖아요. 1선거구 1인제는 정치적으로 이념 세분화가 안 되는 구조예요.”

문 대통령이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주변에 노무현 사람들이 너무 많아.” 

문재인 대통령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으신가요.

“문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 저에게 비대위원장을 제의한 적이 있었어요. 제가 사양했죠.”

과거에 쓰신 책을 보면 최저임금 인상에 긍정적이었습니다.

“올리는 건 당연한데 약간 높았던 거 같아요.”

북유럽식 경제 모델을 적용하는 게 가능할까요. 

“맥아더 사령부가 종전 후 일본에 갔을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연구한 학자들이 대거 따라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뉴 딜러(New Dealer)라고 불렀지요. 그들이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농지개혁이었습니다. 그리고 재벌 해체와 노동조합을 완전히 자율화시켰지요. 아직 일본에 우리가 배울 게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 현실에서 다당제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비례대표제가 내각책임제에 알맞은 제도라면, 양당제는 대통령 중심제와 맞습니다. 한반도가 통일되거나, 그 전에 긴장이 완화되면 우리도 내각책임제로 바꿔야 합니다. 과도기적 현상으로서 비례대표를 늘릴 필요는 있습니다. 대의민주주의 측면에선 내각책임제가 더 나은 구조지요.”

개헌에 대해선 어떤 입장이십니까. 

“5년 단임제가 꼭 나쁘다고 보지 않아요. 지금은 스피드 시대거든요. 4년 플러스 4년이나, 5년 단임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다음 대선은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다만 황교안 대표로 자유한국당이 정권을 되찾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솔직히 황교안은 박근혜가 키워준 사람 아닌가요.”

극우 성향의 태극기부대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나라에 극우 세력이 안 생길 수가 없어요. 해방 후 남북 분단, 6·25가 있었기 때문이죠. 서양에서 이민 문제로 극우정권이 생긴다면, 우리는 분단체제 때문에 극우 세력이 생기는 구조입니다. 솔직히 문재인 정부는 진보정권이 아니에요. 앞서 말한 뉴 딜러 정부와 비슷해지려면 진보성을 더 강화해야 합니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손수 원고지에 써 시사저널에 선물한 글 ‘삼김 일노의 회상’ ⓒ 시사저널 고성준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손수 원고지에 써 시사저널에 선물한 글 ‘삼김 일노의 회상’ ⓒ 시사저널 고성준

“이해찬이 민주당을 망치고 있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년 장기집권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며)그거 미친 소리야. 이해찬이 민주당을 망치고 있어요. 설령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속으로 이야기 해야지. 건방진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만용’이에요.”

지금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을 만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극우 세력이 커갈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대한 대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남북관계 때문에 엄청 커졌어요. 나중에 정권의 위험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진보정치가 패거리 정치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이데올로기 단계에서 출발한 진보정치는 모델론으로 갑니다. 노르웨이 방식이냐, 유럽 모델이냐는 식이죠. 그런 다음 프랙티컬(구체적인) 문제로 갈 겁니다.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하던 시절은 갔어요. 모델론도 약화된 거 같고요. 이제는 구체적인 정책이 필요한 때지요. 정의당 정책집을 봤는데, 상당히 구체적이더군요.”

노회찬 의원 사망으로 진보정치의 대중성이 약화된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노회찬 의원은 진보정치의 엘리트죠. 그런데 지금 진보정치인들은 너무 가방끈이 긴 거 같아요. 진보정치는 가방끈이 긴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단병호(전 민노당 국회의원) 같은 사람이 해야 해요. 아주 실천적으로 일할 사람이 말이죠.”

새 정치가 담아야 할 가치가 뭐라고 보십니까. 

“한때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새 정치를 기치로 들고나왔는데, 안 전 대표는 정치 입문부터 실수했어요. 참모부터가 틀렸어요. 보세요, 법륜 스님이 멘토예요. 그리고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지역구 선거를 한 번도 안 치러본 사람입니다. 주일대사를 지낸 최상룡 전 고려대 교수도 마찬가지고요.”


‘광주민주화운동’ 용어 만들어낸 주인공

남 전 장관은 민정당이나 민자당 내에서 진보성이 강한 여당 정치인으로 통했다. 정치 입문 전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활동했기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남 전 장관은 “예전 조선일보는 진보성이 강했는데, 이제는 보수를 넘어 극우매체가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남 전 장관이 예로 든 인물은 최석채 전 조선일보 주필이다. 그는 “이분이 편집국장과 주필을 하셨는데, 4·19 이후 대구에서 사회대중당으로 출마했다. 양호민(전 조선일보 기자)도 사회대중당으로 나왔다”고 술회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은 남 전 장관의 작품이다. 때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1987년 대선에서 당선된 직후다. 인수위 성격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화위) 회의에서 하루는 이전까지 ‘광주사태’라 불린 이 사건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혁명·폭동·의거 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는 자리에서 남 전 장관은 이렇게 제안했다.

“민주화운동으로 합시다.” 

당시만 해도 노태우 당선자 주변 군부 세력은 사석에서 ‘광주폭동’이라고 부르던 때였다. 그 와중에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커다란 정치적 결단임에 틀림없다.  

동년배 중 문인들이 참 많습니다.

“많지. 내가 원래 1933년생인데, 호적이 약간 늦어져 1934년 1월이에요.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이 내 친구예요. 서울대 입학이 같아요. 1952년 대학 입학 때부터 알았어요. 민음사에 박맹호라고 있었어요. 얼마 전에 죽었지. 걔도 친구예요. 고은(시인)도 동갑이고. 얼마 전 (시사저널이) 인터뷰한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도 나랑 같을 거야. 그 친구도 참 특이한 친구예요.”

책을 3만~4만 권 정도 소장하셨다고요. 

“내가 3년여 전에 이사했는데, 그 전에 살던 단독주택이 컸어요. 책이 한 4만 권쯤 됐지요. 한길사에서 파주(헤이리 예술인마을 내)에 어마어마한 도서관을 지었어요. 그러면서 자기들한테 기증하라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한길사 주는 것보다 가난한 신문사인 ‘한겨레’ 주는 게 낫겠더라고요. 그렇게 다 가져갔는데, 한겨레가 기자들에게 주고도 남았어요. 

내가 줄 때 그랬어요. 절대 내 이름을 밝히지 말고 익명으로 하라고. 인터넷으로 한 장에 1000원짜리 쿠폰을 발행해 가져가라고 하니, 싹 가져갔던 거예요. 인터넷에서 보니까 내가 15만원 주고 산 미술책을 1000원 주고 사더라고요. ‘남재희 책’이라고 하니, 많이들 가져갔나 봐요.”

두주불사로 유명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폭탄파가 있었어요. 이한동(전 국무총리)이 폭탄파의 대장이었죠. 맥주 반 잔에 양주 반 잔을 섞어 톡 털어 먹어.” 

이한동 총리 말고 또 누가 있었나요. 

“민정당 사무총장을 지낸 심명보하고 김성기라고 법무장관으로 일한 애들이었지. 그런데 이 친구들 다 죽었어요. 이한동만 살아 있지. 이한동은 체격이 장사여서 술 소화량이 많았어.”

요즘은 (술을) 안 하십니까.

“조금 해요. 한창 마실 때도 난 폭탄주는 안 했어요. 소주나 맥주를 마셨지. 폭탄주는 단숨에 들이켜는 게 문제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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