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하루 마약검사 300건…‘머리털’에 신음하는 국과수
  • 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19.05.03 17:00
  • 호수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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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과의 전쟁’ 치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독성학과

‘진실을 밝히는 과학의 힘.’ 강원도 원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본원 입구에 새겨진 슬로건이다. 그 앞에 최근 마약 투약 혐의를 받고 있는 여러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박유천과 황하나, 로버트 할리, 재벌 3세, 그리고 ‘물뽕 논란’을 일으킨 일당까지. 물증 앞에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국과수에 몸담은 지 30년 동안 최근처럼 정부 차원에서 마약 척결을 강조한 적은 없었습니다. 가히 마약과의 전쟁이죠.” 김은미 국과수 법독성학과장은 대신 ‘야근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는 국내 최고 마약 전문가로 통한다. 그를 포함한 마약 분석 연구원들은 비교적 야근이 적다는 공무원이다. 하지만 요즘은 밤 10시까지 근무가 일상이라고 했다. 

언론에선 “마약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한 문장으로 국과수의 분석 결과를 소개한다. 이에 대해 김 과장은 “그 결과를 내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잘 모르실 것”이라고 했다. 시사저널이 4월29일 국과수 본원에서 필로폰을 모발로부터 검출하는 과정을 따라가 봤다. 

4월29일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본원에서 김은미 법독성학과장이 액체크로마토그래피 질량분석기 옆에서 마약반응검사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4월29일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본원에서 김은미 법독성학과장이 액체크로마토그래피 질량분석기 옆에서 마약반응검사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야근과의 전쟁’ 치르는 국과수 연구원들

필로폰 감정은 크게 7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분류’다. 경찰로부터 전달된 모발을 가로로 펴서 눈금이 그려진 종이에 붙인다. 분류가 진행 중인 연구실은 무척 조용했다. 연구원 3명은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핀셋으로 모발을 한 올씩 옮기고 있었다. 설일웅 연구관은 “숨이라도 크게 쉬면 모발이 날릴 수도 있다”며 “한 사람의 구속 여부가 달린 일이라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둘째 단계는 ‘분할’이다. 눈금을 참고해 모발을 3cm 간격으로 자른 뒤, 따로따로 시험관에 넣는다. 투약 시기를 추정하기 위해서다. 머리카락은 보통 한 달에 1cm씩 자란다. 즉 모근으로부터 0~3cm 구간에서 필로폰이 검출되면, 3개월 이내에 투약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실험자의 모발 길이에 따라 시험관이 4~5개 나올 수도 있다. 당연히 검사 횟수도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실험실 안쪽엔 작은 가위와 정체 모를 액체 통이 가득 깔려 있었다. 셋째 단계 ‘세척’과 넷째 단계 ‘추출’을 위한 도구다. 연구원이 모발이 담긴 시험관에 세척제를 넣었다. 이물질을 없애는 작업이다. 이 단계 때문에 ‘모발이 채취 과정에서 오염될 수 있다’는 피의자의 주장은 통할 수 없게 된다. 

세척이 끝난 시험관엔 용액을 넣고 가위질을 반복한다. 이렇게 모발을 잘게 잘라야 필로폰 성분이 섞인 혼합물질을 추출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 24시간 동안 시험관을 기계로 섞어준다. 여기까지가 전(前)처리 작업이다. 진짜 ‘검사’는 그다음인 다섯째 단계다. 

추출이 끝난 시험관은 ‘가스크로마토그래피 질량분석기’에 들어간다. 이 기기는 모발에서 나온 혼합물질을 분리한 다음 필로폰의 고유 분자량을 측정한다. 이러한 측정은 국제 공인을 받은 필로폰 감정법이다. 

그럼 이제 분석기가 자동으로 양성·음성 여부를 알려주는 걸까. 아니다. 이를 가리는 건 연구원의 몫이다. 여섯째 단계인 ‘분석’이다. 분석기 옆 모니터엔 정체 모를 숫자들과 곡선이 뒤섞여 있었다. ‘피크(peak)’라 불리는 분자량 그래프다. 연구원은 “피크를 보고 공식을 적용해 필로폰이 체내 대사 과정을 거쳐 생성되는 암페타민 양을 측정한다”고 설명했다. 그다음에야 양성·음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정확도에 있어 국과수는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다고 한다. 

이제 연구원은 판단 결과를 토대로 감정서를 작성하고 결재를 받는다. 마지막 ‘보고’ 단계다. 이 단계에 오기까지 빠르면 이틀, 길면 5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체포한 마약사범을 구속할 필요가 있는 경우다. 형사소송법상 체포 뒤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하는 시한은 48시간이다. 이 시간 안에 감정 결과를 알려주지 않으면 범인을 풀어줄 수밖에 없다. 국과수로선 초비상 상황이다. 

이처럼 이례적 경우가 아니라도 국과수 업무는 이미 과포화 상태라고 한다. 김은미 과장에 따르면, 지난해 국과수가 감정한 마약 사건은 1만8000건이다. 한 달로 치면 1500건이다. 그리고 국과수 본원을 포함한 전국 분원의 마약 분석 연구원은 총 15명이다. 한 명당 매달 100건을 처리한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300건으로 늘어났다. 정부가 2월25일부터 3개월 동안을 ‘마약 집중단속기간’으로 선포해서다. 초반 두 달에 경찰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70% 많은 마약 관련 사범을 적발했다. 당연히 국과수로 몰려드는 모발 역시 쌓일 수밖에 없다. 


인력·연구 지원 미흡…“감정 수준 밀려날 것”

경찰은 마약수사 인력을 현행 150명에서 내년에 25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식약처는 마약안전기획관(국장급) 직을 신설한다고 4월30일 밝혔다. 이처럼 유관기관이 몸집을 키우고 있지만, 국과수에 대한 지원 소식은 없다. 김 과장은 “정부의 마약 근절 의지는 강한데 과학수사 강화 의지는 약한 것 같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더 시급한 문제는 따로 있다. 환각효과가 증대된 신종 마약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SK·현대가 3세들이 투약했다고 알려진 액상대마도 신종 마약의 하나다. 관세청은 파티용으로 알려진 신종 마약 엑스터시를 작년 1~7월 626g 적발했다. 2013년(267g) 대비 135% 증가했다. 

신종 마약은 기존 마약과 화학구조가 다른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감정법도 새로 개발돼야 한다. 프로포폴이 그 예다. 과거엔 소변검사가 아니면 프로포폴 투약자를 잡아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2013년 이후부턴 모발검사로도 덜미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이 감정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이 바로 김 과장이다. 

김 과장은 “지금은 신종 마약 연구는 꿈도 못 꾼다”며 “마약범죄는 지능화하는데 대응은 선제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대로 가면 국과수의 마약 감정 능력이 세계적 수준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김 과장에게 ‘액체크로마토그래피 질량분석기’ 옆에서 포즈를 취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마와 신종 마약 검사에 특화된 6억원짜리 초고감도 기기다. 본원에 한 대밖에 없다고 한다. ‘과학수사는 장비싸움’으로 불릴 만큼 기기가 중요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보급이 힘든 실정이다. 김 과장은 “내 몸값보다 비싼데 옆에 서도 되겠나”라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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