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정교육은 아마도 허구(虛構)?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08 18:00
  • 호수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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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다. 어린이날에 어버이날을 거쳐 부부의 날을 지나가자니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며칠 전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직접 경험한 일이다. 우리가 사는 단지에는 정문과 후문 이외에 쪽문이 있다. 주민들이 종종 이 쪽문을 열어 두는 바람에 아파트 관리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민원이 제기되곤 한다.

그날도 앞에 걸어가는 20대 초반의 여성이 열린 쪽문을 그대로 둔 채 지나가기에, “앞에 가는 분 쪽문 닫아줄래요?” 부탁을 했더니, 휙 돌아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줌마! 나 알아요?” 묻는 게 아닌가.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문을 닫아라 말라 웬 참견이냐는 투에 불만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이다. 순간 말문이 막힌 채 망연자실 서 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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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으로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탓이겠지’ 혀를 끌끌 차다 보니, 문득 우리가 언제 가정교육을 제대로 시킨 적이 있었던가, 반성이 올라온다. 흔히 예전 3대 혹은 4대가 함께 살던 확대가족 안에서는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어른을 공경하도록 가르치고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행동은 삼가도록 버릇을 가르쳤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확대가족 내 가정교육이란,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할 것, 어른 말씀을 따르고 복종할 것, 아랫사람은 어른이 수저를 드신 다음 수저를 들 것, 밥상 앞에서는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밥을 먹을 것 등을 의미했던 것 같다. 그나마 이런 식의 가정교육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있는 집에서’나 가능했으리라. 대다수 부모들은 대여섯 명에 이르는 자녀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가정교육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것 같다. 

대신 우리가 오늘날 추론하는 가정교육은, 자주 왕래하던 친족이나 마을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이웃의 몫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느 집 몇째 아들인지 딸인지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부모님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동네 어르신들이 주의를 주고 삼촌이나 친척 형들이 가르쳤을 것이다. 

그랬던 예전의 친족 및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이제 고향을 떠나온 익명적 개인들끼리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등장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아파트나 연립주택과 같은 공동 주거단지에서 뉘 집 자식인지도 모르는 이방인들과 어울려 살았던가.

‘가정교육’이 실종된 자리에 이를 대신할 어떤 주체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위아래도 모르고 버릇도 없는 자녀 세대가 우리 앞에 등장한 것 아니겠는지. 이제 와서 가정교육 상실의 책임을 굳이 묻자면, 어느 누구라도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체면을 차리고 예의를 지킬 것이 아니라, 낯모르는 이들 사이에서도 서로를 존중해 주고 예의를 다할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음을 누구를 탓하겠는가.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 시대를 지나 1인 단독가구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웃 공동체나 친족 공동체에 기반한 과거의 가족양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불가능할 것이다. 더더욱 과거의 예의범절이나 친족 규범이 오늘날 기준에서 볼 때 이상적인 것도 아니요,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 편을 향해서는 살뜰히 예의를 갖추지만, 이방인에게는 편견에 적대감 가득한 눈길을 보내던 아픈 과거를 미화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나이가 어려도 존중하며, 사회적 약자를 품어주어야 한다는 기본적 예도 우리의 문화로 충분히 체화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반성을 요한다. 

그렇다면 가정교육의 실종을 아쉬워하기보다 더 늦기 전에 사회적 책임과 성숙한 배려를 위한 ‘시민교육’을 우리 집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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