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패스트트랙’과 ‘우직지계’
  •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5 18:00
  • 호수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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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자병법에는 얼핏 정반대의 주장을 같이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몇몇 있다. 예를 들어 ‘속도’에 관한 것이다. 손자병법의 ‘작전(作戰)’편에는 “서투르지만(拙) 빨라야(速)한다는 것은 들어보았으나 교묘하지만(巧) 오래 끌어야(久)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라고 언급돼 있다. 전쟁에서 스피드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실제로 몽골 기병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기마병 특유의 스피드를 활용해 정복을 거듭한 끝에 거대 제국 건설에 성공했다. 그런데 ‘군쟁(軍爭)’편에는 ‘급한 군쟁은 삼가라’고 나와 있다. 속도만을 중시한 나머지 군대를 너무 빨리 진격시키면 그 “군대는 장비가 없어 패망하고 양식이 없어서 패망하며 남겨 쌓아 둔 물자가 없어 패망”한다는 것이다. 역시 군쟁편에 ‘우직지계(迂直之計)’, 즉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빨리 가는 계책’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2. 나폴레옹은 당시 병참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병사들의 숙식 문제를 극단적으로 다이어트해 진격 속도를 타국 군대의 두 배 이상 늘렸다. 그 결과 스피드가 프랑스 군대의 최대 장점이 된 것이다. 다른 군대는 탄약뿐만 아니라 행군 중 야영에 필요한 천막 등 장비와 함께, 빵을 굽기 위한 밀가루, 오븐 등 조리 장비들을 마차 등에 잔뜩 싣고 다니느라 행군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아예 천막 등은 가지고 다니지도 않고 담요 등 병사별로 간단한 노숙 장비를 지니고 다니게 했다. 또 신대륙에서 들어온 감자를 가지고 다니면서 냄비로 끓여 먹도록 해 식량 문제도 해결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군대는 워털루에서 보병이 너무 빨리 전장에 도착한 데다 악천후까지 겹쳐 포탄 등을 실은 마차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큰 패배를 맛보았다.

#3.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말 서울 수복 후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시작했다. 한반도의 오른쪽은 미군의 알몬드 중장이 이끄는 10군단이 맡았는데 가장 동쪽은 이 군단 산하의 미 해병대 1사단이 맡았다. 스미스 소장이 사단장이었다. 알몬드 중장이 직접 지휘하는 육군부대는 파죽지세의 속도로 북진을 거듭했으나 알몬드의 채근에도 해병대의 전진은 상대적으로 더디었다. 스미스는 진격하는 동안 경유하는 지역 곳곳에 중간 병참기지를 만들어 탄약·식량 등 보급품을 쌓아 두고, 그곳에서 보급품을 더 받을 수 있도록 활주로도 만들면서 전진했다. 그런데 이 두 장군의 진격 방식은 곧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았다. 이미 야음을 틈타 산악지역에 깊숙이 침투해 있던 중공군의 총공세에 육군부대는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으나 철저히 다져가며 전진했던 해병대는 때때로 반격을 펼치며 흥남부두까지 질서정연한 후퇴에 성공했다. 피해는 1000명 이하의 전사자 등에 그쳤으나 이들을 공격했던 중공군 9병단은 이 해병대 1사단의 반격과 항공 지원 등으로 2만5000명이 전사하는 등 부상병까지 합쳐 전 병력의 40~60%에 달하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의원들이 4월2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STOP(멈춤), 국민이 심판합니다!'에서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의원들이 4월2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STOP(멈춤), 국민이 심판합니다!'에서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요즘 정치권에서는 ‘패스트트랙’이 태풍의 눈이 되고 있다. 선거제 개편, 공수처 신설 등에 관한 법안들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됐고, 이에 제1야당은 장외투쟁으로 돌아섰다. 여야가 서로 ‘열심히’ 고소·고발을 한 결과, 고소·고발 당한 이들의 수는 160명을 넘어섰다. 덕분에 국회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하면서 민생·경제 관련 법안들은 모두 ‘슬로트랙’에 태워진 형국이다. 여당 입장에서 스피드만을 중시한 나머지 치르는 비용이 너무 크지 않나 싶다. 후자 법안들이 패스트트랙에 올려져야 됐었다는 야당 주장을 흘려들을 수 없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의 ‘우직지계’가 자꾸 떠오르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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