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보요원 “5·18, 전두환 신군부가 기획한 것”
  • 정성환 호남취재본부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5 09: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3목격자 김용장·허장환 광주서 기자회견…39년만의 증언
신군부 5·18 기획설, 폭동화 조건 많이 갖춰 광주 ‘선택’
카터 정부도 신군부 손들어줘…“왜곡된 5·18 역사 다시 써야”

“5.18은 신군부의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5·18민주화운동이 전두환 신군부가 사전에 기획한 것이라는 한·미 정보요원의 증언이 나왔다. 이른바 ‘신군부 5·18 기획설’을 폭로한 것이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내란의 수괴로 엮기 위해 신군부가 ‘사전 작업’을 통해 폭동을 유도했다는 것이 골격이다. 미 육군 501정보단 출신 김용장 씨와 505보안부대 특명부대장을 지낸 허장환 씨는 5월 14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센터 대동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광주항쟁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기획됐다고 주장했다. 

‘5·18 기획설’은 지난 39년 동안 숱하게 제기돼 왔지만 일각에서 제기하는 음모론 공세에 밀려 힘을 받지 못했다. 기획설을 인정하기 위한 심증형성의 정도는 합리적인 의심 수준을 뛰어 넘을 수준이었으나 신뢰할 만한 관계자 증언이나 증거가 없어서다. 하지만 이날 광주에서 밝힌 두 한·미 정보요원 증언은 이전과는 무게감이 달랐다. 김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시 광주의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해 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었고, 허씨는 신군부가 기획한 시나리오를 최일선에서 직접 수행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왜 광주를 선택했나…‘신군부 5·18 기획설’ 근거는. 

​​14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센터 대동홀에서 김용장 전 미 육군 501정보단 요원이 5·18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14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센터 대동홀에서 김용장 전 미 육군 501정보단 요원이 5·18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신군부가 광주를 소요사태의 적지로 ‘선택’한 것은 기획 요건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그는 “광주는 역사적으로 항상 항거하는 도시였고, 규모도 적당하는 등 지형적 위치와 김대중(DJ)과의 연관성 등 ‘폭동화’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대구와 부산은 자기네 고향이자 규모가 커서 컨트롤하기 어렵고, 전주와 대전의 경우 규모는 적당했지만 김 전 대통령과 관련이 없다거나 서울과 너무 가까운 점 등 때문에 배제됐을 것이라고 김씨는 분석했다. 그는 “목포는 DJ와 직접 관련이 있는데다 규모가 작고 남쪽에 치우친 위치가 작전상 어려운 위험요소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증언을 종합하면 광주는 단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내란의 수괴로 엮으려는 신군부의 ‘선택’을 받은 도시였다.

그는 이러한 전두환 신군부의 기획 배경에는 ‘KT공작’ 즉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내란사건으로 엮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하며 “자신들이 만든 시나리오에 따라 모든 것이 진행됐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러한 전두환 신군부의 기획설은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시민을 가장한 계엄군인 편의대에 대한 증언도 이어졌다. 광주를 선택한 신군부는 일반 시민인 것처럼 행세하며 시민들을 선동하고 유언비어를 퍼트릴 특수 공작부대 ‘편의대’를 광주로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김씨는 자신이 직접 편의대를 본 적이 있다는 증언을 내놨다.

그는 “5월19일 아니면 20일께 광주 K57 비행장에 군 수송기 C135를 타고 30~40명 정도가 와서 정문 근처 격납고에 주둔했다”며 “협조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무실에서 대충 10분도 걸리지 않은 격납고로 직접 찾아가 마침 밖에 나와 있는 두 사람을 봤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넝마처럼 보이는 20대 후반의 젊은 남성이었고, 나중에 그가 편의대원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고 했다. 김씨는 “보고서에 ‘편의부대가 존재한다’고 서너 줄 썼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당시 그들은 사복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로 들어갔으며 방화, 총격, 장갑차 탈취 등은 편의대가 선봉에서 시민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으로 추정한다”며 “유언비어 역시 이들이 시민으로 위장해 벌인 공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군부의 편의대 운영을 통한 시민 선동이 김대중을 내란사건으로 엮기 위한 것으로 ‘5·18 기획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로 짚었다. 

5·18 당시 실제 신군부의 기획에 참여했던 허장환씨도 같은 취지의 주장을 폈다. 허씨는 “전두환이 작성한 ‘양지일지’에는 홍석률 대령을 선무대장(편의대장)으로 광주로 내려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며 “당시 비행일지에도 선무공작원 몇 명이 탑승해 광주로 왔다는 기록도 있다”고 했다. 

특히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이 1988년 광주청문회 당시 ‘5월 항쟁 기간 왜 그렇게 광주에 자주 내려갔느냐’는 질문에 “대원들 편의복을 가져다주러 갔다”고 답변한 점도 편의대 활동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언급됐다. 

허씨는 사복 차림으로 적진에서 교란 활동을 하는 편의대원들은 ‘유언비어 유포조’, ‘장갑차 탈취조’, ‘무기고 탈취조’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아시아자동차에서 군용 장갑차(APC)를 탈취해 운행한 것도 편의대의 소행”이라고 강조했다. 이 자동차공장은 보안 목표로 특별방호가 필요한데도 탈취 당시 공장을 지키는 병력이 없었던 점과 장갑차 운전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 당시 공수특전단 요원뿐이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5월 항쟁 기간 공수부대를 포함한 계엄군도 보안사의 지휘를 받아 각본대로 움직였다. 5월 21일 공수부대가 시민군에 밀려 전남도청에서 외곽으로 퇴각한 것은 사전에 기획된 것이라는 게 허씨의 설명이다. 그는 민주화의 물결이 계엄군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광주를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못박았다. 

허씨는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이 몰려온다고 해서 특수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원들이 퇴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광주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기획된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시 외곽으로 빠진 군은 그때부터 광주를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고 빠져나가려는 사람을 이유 불문하고 사살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는 모습을 보여야 ‘위력 구사’라는 조작된 시나리오가 성립될 수 있었다”며 “이러한 작전 상황과 공수부대의 배치 등을 모두 505보안부대에서 지시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美 카터 정부의 국익 우선주의·인권중시, 신군부 만행 ‘묵인’

5·18 당시 미국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씨와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씨가 14일 광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5·18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5·18 당시 미국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씨와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씨가 14일 광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5·18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광주항쟁 당시 미국의 역할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전두환 신군부 만행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묵인’이라고 김 씨는 규정했다. 김씨는 “3개 공수여단 등 대규모 병력이 출동하는데 미국의 허락 내지 묵인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신군부 기획에 대한 미국의 묵인 또는 방조에 무게를 실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씨는 카터 정부의 도덕주의, 인권 중시 정책과 미국의 국익 우선주의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그는 “카터 대통령이 취임 직후 인적 정보망인 휴민트(HUMINT)를 없앤 것이 그의 큰 실책 중 하나”라며 “그래서 이란이 넘어갔고 미국은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덕주의와 인권 중시를 브랜드로 내세운 미국이 결과적으로는 신군부의 손을 들어줬다”고 했다.

김씨는 글라이스틴 대사의 정보 왜곡도 한 몫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글라이스틴 대사는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성이 없는 인물인데도 그의 왜곡된 보고서가 국무성 라인을 통해 카터에게 전달됐고, 이에 따라 결국 카터가 신군부의 손을 들어줬다”고도 했다. 

김씨는 미 국방성 정보 보고서보다 국무성 보고서가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선호되는 것은 미국의 국익 최우선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김씨는 “미국은 국익을 우선시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미국으로서는 정통성이 없는 전씨를 대통령으로 앉혀놓으면 일하기가 쉽다”며 “미국은 (5·18과 관련해) 전씨에게 사전에 보고를 받거나 사후에 묵인했을 것”이라고 했다. 

 

진상규명 위해선 광주 상황 실시간 기록한 美정부 문건 요구해야

김용장씨는 신군부 기획설을 뒷받침할 기록 등 증거가 발굴된다면 5·18 역사는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1980년 광주 상황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했던 미국 정부가 보유한 문건을 지목하며 여기서부터 단서를 찾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씨는 “앞으로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먹칠(삭제)한 보고서가 아닌 원본을 보내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해야 한다”며 “이미 먹칠한 보고서들도 제가 알기로는 우리 국회 도서관에 700건 정도 와있는 것으로 안다”고 부연했다. 김 씨는 “광주항쟁에 대한 역사를 지금부터 다시 써야 한다”며 “여태까지 쓰인 역사는 옳은 역사가 아니며 잘못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