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도와 재미 동시에 잡은 ‘봉준호리즘’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02 09:00
  • 호수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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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으로 돌아본 봉준호의 필모그래피

반지하에는 백수인 기택(송강호)네 식구가 입에 풀칠하며 산다. 언덕 위에 자리한 고급 저택에는 신흥 재벌 박 사장(이선균)네 식구가 아쉬울 것 없이 산다. 현실에선 두 가족이 만날 일이 드물다. 재벌은 반지하가 더덕더덕 붙은 낙후된 동네에 갈 일이 딱히 없다. 서민은 부촌에 갈 여력이 없다. 이들을 만나게 하는 연결고리는 기택네 장남 기우(최우식)의 과외 아르바이트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육은 신분을 갈아탈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가난한 자에게 명문대 졸업증은 부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용이 된다. 《기생충》은 위조한 대학 서류를 빌미로, 만나기 힘든 두 가족을 모은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봉준호는 두 가족을 단순한 대결 구도로 몰아넣을 생각이 없다. 상생이나 공생도 아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지점으로 더 들어간다. 기생이다. 이 기묘한 기생을 담아낸 《기생충》은 올해 칸국제영화제를 발칵 뒤집었다. 

봉준호 감독 ⓒ Xinhua
봉준호 감독 ⓒ Xinhua

장르 비틀기의 대가

봉준호는 과거, 비디오 가게에서 이 테이프를 어느 장르 코너에 꽂아야 할지 모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그의 영화 인생은 실제로 그러했다.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소동극인 동시에 사회극이었고, 《살인의 추억》 안엔 필름 누아르와 사회 풍자가 동거했으며, 괴수물인 줄 알았던 《괴물》엔 더 괴물 같은 한국 사회의 시스템이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던 모성의 신화를 완전히 비튼 《마더》는 범죄 미스터리인 동시에 심층 심리극이다. SF 장르를 표방한 《설국열차》는 아예 기차 칸칸이 다양한 장르로 기능했다. 모험극인 《옥자》는 러브스토리로 분류해도 무방한 영화였다.

《기생충》 역시 그 흐름 위에 있다. 영화는 코미디로 시작해 스릴러, 공포를 아우른다. 물론 여러 장르를 뒤섞었다는 게 감독의 연출력을 논하는 기준은 될 수 없다. 중요한 건 어떻게 섞어 내느냐인데, 봉준호는 장르 영화의 최전선에서, 장르의 규칙을 조금씩 변형하며, 기존 장르 영화와는 결이 다른 장르물을 그려 왔다는 점에서 특기하다. 《기생충》에 대해 미국 영화매체 인디와이어는 ‘봉준호 자체가 장르’라고 평했는데, 이 코멘트는 그래서 퍽이나 알맞아 보인다.

‘봉준호리즘’으로 명명할 수 있는 봉준호 장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사회적 요소’들이다. 개인적으로 《기생충》이 흥미로웠던 건 사회를 바라보는 봉준호의 차가워진 시선이다.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옥자》 등에서 인물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괴로워했지만, 그럼에도 그런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일말의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기생충》의 기택 가족에겐 그러한 포부가 희미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가난을 어떻게든 바꾸려 하기보다, 적당히 머리를 잘 써서 최악만 피해 보자는 쪽에 가깝다. 이들의 선택이 ‘기생’이라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부자니까 착한 거야. 원래 잘사는 사람들이 구김살이 없어”라는 기택의 아내 충숙(장혜진)의 대사 속엔 희망하는 것마저 사치인 현실이 녹아 있다. 기택 가족은 시종 유쾌하게 낄낄대지만, 그들을 보는 우리는 쉽게 웃을 수 없는 이유다.

앞서 이야기했듯 《기생충》은 갑과 을의 대결을 지루하게 답습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들의 관계는 암묵적인 선(線)에 의해 팽팽하게 조율돼 있다. 이 선은, 마음의 38선이다. 박 사장은 말한다. “매사에 선을 잘 지켜. 내가 선을 넘는 사람들 제일 싫어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에 의해 무너진다. 가난한 자들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매케한 냄새. 선과 냄새라는 이미지를 계급 갈등의 모티프로 활용한 점은 《기생충》을 즐기는 묘미다.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의 소유격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계급 갈등을 다룬다는 면에서 《설국열차》를 떠올리게 하고, 한 가족의 처절한 고군분투기란 점에서는 《괴물》을 소환한다. 사회의 모순을 길어내는 화법은 《살인의 추억》에도 있었다. 《마더》의 잔혹성 역시 《기생충》은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장 크게 맞닿아 있는 작품은, 봉준호 감독 스스로가 밝혔듯 김기영 감독의 《하녀》다. 봉준호 감독은 과거 《하녀》에 대해 “아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그 당시 한국 사회와 계급이 변해 가는 상황들이 아주 적나라하게 잘 담긴 영화”라고 코멘트한 적이 있다. 《하녀》와의 연결점은 공간에서도 발견된다. 《하녀》의 주 공간은 이층집이었다. 당시 이층집은 중산층 가정에서만 볼 수 있었던 상징적인 공간으로, 이는 《기생충》에서 반지하라는 공간으로 대비를 이룬다. 지상의 절반에만 걸쳐진 공간. 자칫 지하로 굴러떨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곳. 반지하 구조를 통해 영화는 인물들의 비루한 욕구를 창의적으로 극화해 낸다. 

김기영 감독 《하녀》의 흔적

《기생충》의 흥밋거리이자 봉준호 전작들과의 연결고리 중 하나는 기상천외한 캐릭터들이다. 너디(nerdy)한 캐릭터 만들기에 각별한 소질을 지닌 봉준호의 손끝에서 탄생한 인물들은 저마다 개성을 발휘하며 눈도장을 찍는다. 최우식과 박소담은 대선배들 앞에서 주눅 들기보다, 프로들의 세계 안에서 신명 나게 자신들의 장기를 마음껏 펼쳐낸다. 조여정은 자신이 연기적으로 저평가받아 온 배우임을 증명해 보이고, 장혜진은 앞으로의 활발한 활약을 예고한다. 특별 언급을 하자면, 이정은이다. 《옥자》에서 슈퍼돼지 옥자 목소리를 연기하기도 했던 이정은은 《기생충》에서 옥자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몇몇 장면에서 이 배우가 보여주는 표정은 서늘한 동시에 안쓰럽고 무서워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송강호다. 극 초반 뒤로 물러서 있던 송강호는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송강호의 존재감은 자칫 희화화돼서 휘발될 수 있는 전체 캐릭터들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동아줄이다. 무엇보다 《기생충》은 재미있다.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탄 작품은 작품성은 높지만 재미는 약하다는 선입견이 《기생충》 앞에선 유독 힘을 쓰지 못한다. 같은 의미로 《기생충》은 장르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좋은 성과를 얻기 힘들다는 선입견 역시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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