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치 열망한 독일 청년층의 대반란
  • 강성운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06 15:00
  • 호수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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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럽의회 선거에서 기성 정당 참패, 녹색당 대약진
풍자가가 만든 정당에도 젊은 층 표 쏟아져

5월26일 유럽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올해 선출된 유럽의회는 2021년부터 2027년까지 유럽연합(EU)의 예산안을 마련하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다. 선거는 28개국에서 4억 명의 유권자를 상대로 진행됐다. 독일은 역대 최고치인 61.5%의 참여율을 기록했고, 이들의 투표로 전체 751개 의석 중 96개가 독일 각 정당에 배분됐다.

독일 언론들은 이번 선거 결과를 ‘역사적’이라고 평가한다. 우선 녹색당이 독일 전국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최초로 제2당이 됐다. 녹색당은 20.5%로 지난 2014년 유럽 선거에 비해 지지율을 두 배 가까이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올해 처음 투표에 참가한 청년층에서는 36%가 녹색당을 뽑아 앞으로도 녹색당 강세가 이어지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면 전통의 양대 정당인 기민련과 사민당은 각각 28.9%와 15.8%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특히 사민당은 지지자와 청년 사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한번 기민련과 연합정부를 구성한 것에 실망해 유권자가 대거 이탈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기성 정당이 뚜렷한 약세를 보이고, 청년층이 녹색당의 약진을 견인한 배경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주축이 된 환경 시위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그리고 선거 직전 공개돼 500만 뷰를 기록한 독일 유튜버 리조(Rezo)의 ‘기민련-사민당 비판’ 비디오가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번 독일 내 유럽의회 선거는 청소년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기후변화 대책 마련과 새로운 정치라는 뚜렷한 어젠다가 제출된 변곡점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기성 정당들은 선거 전 내내 극우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의 반유럽 선동에 집중한 나머지, 이 같은 중요한 흐름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5월26일(현지 시각) 독일의 유럽의회 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 베를린 녹색당 당사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 ⓒ EPA 연합
5월26일(현지 시각) 독일의 유럽의회 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 베를린 녹색당 당사에선 환호가 터져나왔다. ⓒ EPA 연합

극우정당 AfD, ‘인종차별·성차별’ 광고 논란

AfD는 이번 선거에서도 무슬림 혐오와 기성 정치 혐오를 조장해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특히 프랑스 화가 장 레온 제롬의 1866년작 《노예시장》이라는 그림을 이용한 광고는 인종차별 논란을 낳았다. 《노예시장》은 터번을 두른 네 명의 남성이 나체의 여성 노예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중 한 남성은 노예의 치아 상태를 확인하려고 손가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AfD는 이 그림에 “(유럽이) ‘유라비아(유럽의 이슬람화)’가 되지 않도록 유럽인은 독일대안당을 뽑는다”는 문구를 넣었다. AfD를 뽑지 않으면 무슬림이 유럽 사회의 주류가 되어 여성을 노예로 만들 것이라는 비합리적 공포를 자극하는 광고다.

독일의 예술전문지 ‘모노폴’은 이 작품이 19세기 유럽에 만연했던 오리엔탈리즘의 산물로, 인종차별과 성차별적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음을 지적했다. 당시 유럽 화가들은 식민주의에 영향을 받아 중동과 동양의 풍습을 상상해 그렸는데, 노예시장 역시 빈번히 채택된 주제였다. 모노폴은 “노예시장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항상 남성들이 나체의 여성 노예를 사고파는 장면을 그렸다. 남성 화가들은 (성에 대한) 금기에서 자유로운 이상화된 체형의 여성들을 상상해 그렸으며, 이 여성들은 중동이 야생적이고 이국적인 곳이라는 선입견을 조장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성차별적 광고는 독일 사회에서 극과 극의 반응을 얻었다. 베를린 경찰에 따르면, AfD의 광고판은 선거 1주일여 전까지 베를린 내에서만 862개가 훼손됐다. 이는 베를린에 설치된 이 당의 광고판 중 40%를 차지하는 수치다. 동시에 AfD 지지자들의 충성도는 독일 정당들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RTL/n-tv 방송사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2017년 총선에서 AfD를 뽑은 사람의 79%가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이 당을 뽑을 것으로 예상됐다. 실제 득표율도 총선 결과(12.6%)에 근접한 11%로 집계됐다.

독일 기성 정당들은 일제히 반유럽 민족주의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냈다. 선거 1주일 전인 5월19일, 베를린·프랑크푸르트·함부르크 등 독일 7개 대도시에서는 ‘모두를 위한 하나의 유럽’이라는 표제 아래 민족주의 반대 시위가 열려 15만여 명(주최측 추산)이 참가했다. 이 시위는 노동조합과 환경보호 단체, 기독교 단체 등 다양한 시민단체가 연합해 조직했을 뿐 아니라, 사민당·기민련·녹색당·좌파당 등 독일 주요 정당의 대표와 유럽선거 입후보자들도 참석해 투표 참여를 격려했다.

ⓒ AP 연합
극우파인 독일대안당(AfD)은 《노예시장》이라는 그림을 이용해 ‘유럽이 유라비아가 돼선 안 된다’는 내용의 선거 광고를 내세웠다. ⓒ 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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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해상구조 허용’을 촉구한 독일 풍자 정당 ‘디 파타이’의 광고 영상 캡처 ⓒ AP 연합

디 파타이, 난민 해상구조 관련 광고로 눈길 

한편 독일의 풍자가 마르틴 존네보른이 만든 ‘디 파타이(Die Partei·정당이라는 뜻)’는 뜻밖의 진지한 선거 광고로 화제를 일으켰다. 디 파타이는 정당 광고 대신 지중해에서 좌초된 난민선 구조활동을 벌이는 인권단체인 시 워치(Sea Watch)의 캠페인 영상을 방영했다. 물에 빠진 난민 어린이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 마지막에 크게 숨을 토하고 가라앉는 모습이 담긴 1분20여초 분량의 영상이다.

EU는 2017년 말부터 시 워치를 비롯한 인권단체의 해상구조활동을 조직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있다. 유엔난민위원회는 2018년 2262명의 난민이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오다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시 워치의 영상 앞부분에는 ‘이 광고의 내용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유럽연합에 있다’는 문구가, 마지막에는 “사람이 익사하는 데 이 영상의 길이만큼 시간이 걸린다.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 열 명 중 한 명은 익사하고 있다. 유럽연합이 모든 종류의 구조활동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막을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문구가 있다.

이 영상은 처음에는 “정당의 광고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디 파타이는 끝부분에 ‘우리를 뽑아주십시오. 우리는 가장 중요한 현안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문구와 로고를 넣었고 결국 공영방송 zdf가 이 광고를 방영했다. 존네보른은 “이번 유럽 선거에는 아무 내용이 없다. 우리 광고 뒤에는 어떠한 풍자적 의도도 없다”며 현안이 결여된 유럽의회 선거운동을 꼬집고 유권자들에게 난민 해상구조활동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뚜렷한 메시지를 담은 광고는 유권자들을 움직였다. 이 정당은 전체의 2.5%(약 90만 표), 투표권을 처음 행사하는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무려 9%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유럽의회 내 의석 수를 2개로 늘렸다.

한편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극우정당인 북부동맹과 국민전선이 각각 34.3%와 23.3%로 제1당이 되어 뚜렷한 우경화 양상을 보였다. 이로써 새로 출범할 유럽의회는 유럽 사회에 대한 희망을 대변하는 정치인들과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모이게 됐다. 독일 국내의 선거 결과에 마냥 환호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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