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국적 맥락의 워라밸
  •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05 18:00
  • 호수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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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 영어 ‘Work Life Balance’의 한국어 발음 앞글자를 조합한 것으로 고용부 포스터에도 공식적으로 등장한 단어다. 2019년 GLINT(HR 관련 글로벌 사회조사기관) 자료에 따르면, 올해의 트렌드 1위 ‘글로벌 리더십 역량’의 뒤를 이어 ‘직원의 몰입 강화’가 2위로 지목되었다. 나아가 직원의 몰입 강화를 위한 최선의 전략으로는 워라밸이 1위를 차지했다. 마침 세계보건기구(WHO)가 정신질환 목록에 ‘번아웃’을 포함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니, 워라밸의 중요성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온다. 워라밸이 깨질 경우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부정적 결과 중 하나가 바로 번아웃이기 때문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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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이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197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워라밸은 처음엔 워킹맘의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방안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워라밸이 연봉 및 고용 안정성을 제치고 직장 선택 기준 1위로 부상함에 따라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워라밸에 대한 정의 가운데는 국제노동기구(ILO)의 제안이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명료하다. 워라밸이란 훌륭한 직장(decent work), 좋은 부모 역할과 건강한 가족, 그리고 자신의 발전을 위한 노력(personal enrichment), 이상의 3영역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관건은 일생 동안 3분의 1씩 나누어 균형을 유지하기보다는, 생애주기별로 현명하게 우선순위를 정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자는 것이다. 일례로 출산과 양육기에는 남녀 불문하고 가족에게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고, 이 시기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일에 집중하다, 은퇴를 앞두고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워라밸에 관한 한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프로그램 도입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개인별 ‘맞춤형’ 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실제로 직원의 워라밸 지원을 위해 이혼 전문 변호사, 가족 상담 전문가, 자녀 교육 전문가 등을 고용하고 있는 것이 글로벌 기업의 추세라니 내심 부럽기도 하다.

정년 60세 시대를 앞두고 한국의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일과 가족 그리고 자신을 위한 투자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100점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도록 했다. 그 결과 세대별로 미묘한 차이를 보여 기성세대는 일(40.8점), 가족(39.1점), 자신(20.1점) 순으로 높은 점수를 준 반면, 신세대는 가족(41.4점), 일(33.9점), 자신(24.7점) 순으로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나타났다.  

연장선에서 일과 개인생활(여가나 휴가 등)이 충돌할 경우 기성세대는 ‘그래도 일을 선택하겠다’는 비율이 10명 중 7명에 가까웠던 반면, 신세대는 거꾸로 10명 중 7명이 ‘일보다는 개인생활을 선택하겠노라’는 의견을 보였다. 대신 워라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대를 불문하고 ‘일과 개인생활을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에 압도적으로 높은 동의율을 보였다. 이는 워라밸 실천 전략으로서 일과 라이프의 통합 내지 혼합을 요구하고 있는 서구의 맥락과 분명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유는 일로 대변되는 공적 영역과 개인생활로 상징되는 사적 영역의 관계가 동서양이 질적으로 다른 데서 연유한다.

프라이버시 영역이 분명한 서구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한 후 공정한 성과 평가를 받으면 된다는 입장을 전제로, 일과 라이프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적 맥락에서는 공사 영역의 구분 자체가 낯설고 모호하기도 하거니와, 사적 영역은 공적 영역에서의 성공을 보장하고 명예를 인정받고자 하는 도구로서의 의미가 강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만큼 일과 개인생활을 분명히 구분해 주어야 한국식 워라밸이 가능해진다. 지금이야말로 생애주기별 워라밸의 의미를 정교하게 규정하고, 한국식 워라밸의 성공이 가져다줄 긍정적 효과에 주목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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