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놔두고 해외 스타트업에 눈 돌리는 한국 대기업
  • 차여경 시사저널e 기자 (chacha@sisajournal-e.com)
  • 승인 2019.06.13 11:00
  • 호수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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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현대차‧LG 등 경쟁적으로 투자조합 설립
모빌리티‧헬스케어 규제 피해 해외 기업 물색

지난해 국내 벤처 투자액이 사상 최대치를 돌파했다. 정부 추산 신규 투자액만 3조원에 이르고 있다. 민간 투자조합과 신기술 투자조합의 투자액까지 포함하면 대략 6조5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스타트업 투자도 크게 늘었다.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해외 유망 기업 투자를 위해 대상 물색뿐 아니라 M&A(인수·합병)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간벤처투자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벤처 투자액 중 비상장 해외 스타트업 투자액은 6926억원으로 조사됐다.

국내 대기업들이 한국이 아닌 해외 스타트업에 눈을 돌린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다. 삼성과 현대차, LG그룹 등은 2~3년 전부터 미국과 동남아시아 등 해외 신사업 스타트업에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로봇 등 해외 신산업 스타트업들이 주로 이들 대기업의 선택을 받았다. 국내에서 M&A에 소극적이었던 대기업들이 해외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월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박람회 ‘CES 2019’에서 삼성전자가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C랩 전시관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 연합뉴스
1월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박람회 ‘CES 2019’에서 삼성전자가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C랩 전시관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 연합뉴스

‘정부 규제·자금·정서’ 탓에 해외로

삼성전자는 삼성벤처투자, 삼성넥스트 등 벤처 투자 전문 자회사를 통해 공격적으로 해외시장에 투자 중이다. AI, 디스플레이, 로봇기술 등 4차 산업혁명 분야 스타트업이 주요 표적이다. 삼성벤처투자는 최근 미국 AI 의료로봇 스타트업인 필로헬스, 미국 디스플레이 업체인 나노포토니카, 이스라엘 반도체 스타트업 윌롯, 동남아 인사관리(HR) 스타트업 스윙비 등에 투자했다. 삼성전자는 2021년까지 180조원을 신기술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과 공유차량 산업에 집중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과거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자동차를 공유하는 것이 새로운 비즈니스”라고 누차 강조했다. 현대차는 동남아 최대 차량 호출 ‘그랩’에 3000억원을, 인도 차량 호출 서비스 기업 ‘올라’에도 3500억원가량을 투자했다. 현대차는 차량공유에 쓰일 자동차를 중동과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올해 하반기 현대차는 러시아 스타트업 혁신센터와도 손잡고 직접 차량공유 스타트업을 설립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LG그룹, 포스코가 각각 벤처투자조합을 통해 해외 스타트업에 투자 중이다. LG그룹은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통해 미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가상현실(VR), 모빌리티 등 분야 스타트업을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 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미국 스타트업에 216억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스타트업 육성에 집중했던 포스코는 올해 1조원 규모 벤처플랫폼을 구상하고 8000억원을 국내외 스타트업 투자펀드에 출자하겠다고 밝혔다.

지분 투자에 이어 해외 스타트업 M&A도 빗장을 열 것으로 보인다. 당장은 투자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스타트업 인수를 통해 기술을 선점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이스라엘 스마트폰 카메라 스타트업, 영국 푸드테크 스타트업을 인수했다. 다른 대기업들도 인수할 수 있는 신생 스타트업들을 찾기 위해 물색 중이다.

2018년 3월 서울 용산구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시사저널e 스타트업 포럼 2018’ 모습 ⓒ 시사저널 고성준
2018년 3월 서울 용산구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시사저널e 스타트업 포럼 2018’ 모습 ⓒ 시사저널 고성준

지분 투자 €이어 M&A도 적극적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국내 벤처 투자액이 증가하면서 전반적으로 스타트업 기업 가치가 올라간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대기업이 ‘시장을 독점한다’는€ 비판을 의식해 국내 스타트업 투자 및 인수에 소극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이사는 “전반적으로 국내 벤처투자가 늘어났다. 대기업은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 자금 외에도 지분과 사업기회를 함께 제안한다. 자금 투자를 하는 벤처캐피털(VC)과는 투자 결이 다르다”며 “지금 국내 벤처시장은 돈이 넘친다. 경쟁이 치열한 산업이라 대기업과의 협업이 간절하지 않다면 (국내 스타트업들은) 대기업보다는 VC 투자를 원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대기업은 해외 스타트업에 눈을 돌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이사는 이어 “국내 스타트업을 인수하거나 지분 투자할 경우 대기업이 ‘코 묻은 돈’까지 가져가려 한다는 일부 비난을 의식하는 경향도 있다. 대기업 그룹 차원에서는 기업 평판도 중요하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정부 규제 탓에 국내 대기업이 해외 스타트업 투자를 늘리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특히 모빌리티나 헬스케어 산업의 경우 해외 스타트업의 성장 속도가 더 빠르다. 국내 스타트업들의 기술력이 뛰어나도 규제를 피하기 위해 서비스를 쉽게 론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해야 하는데 사전 단계가 오래 걸려 스타트업들은 법망을 피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기도 한다. 현행법상 지분 투자 규모가 정해져 있다는 점 또한 대기업엔 장애물이다.

대기업 산하 액셀러레이터 관계자는 “국내 신사업 스타트업보다 해외 기업에 더 많이 투자하는 이유는 규제 영향이 크다. 국내에서는 걸핏하면 규제 때문에 사업을 제대로 못 한다. 규제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사전 단계도 오래 걸린다”며 “해외 스타트업들은 신산업 연구·개발과 사업이 편하다. 상대적으로 투자가 쉽고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대기업은 좋은 기술을 보유한 해외 스타트업을 먼저 선점하기 위해 지분 투자 외에도 적극적으로 인수에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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