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왜 150년 만에 오키나와 역사 조명에 나섰을까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1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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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32화 - 돌아오지 않은 밀사, 류큐와 조선
112년 전 6월15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날에 즈음해

역사가 재미있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평행이론을 심심치 않게 경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 섬에 있던 류큐왕국은 지리적 위치나 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우리와 유사성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민족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과정을 살펴보면 꽤 많은 평행이론을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왕조를 열고 활발하게 교류를 펼친 공통점을 비롯해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은 점, 서구열강에 문을 열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던 사실, 일본의 침략을 받아 수백 년 지속된 왕조가 사라진 것까지도 우리와 류큐의 평행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내세울 수 있다.

거기에 우리의 헤이그 특사사건과 너무나 닮은 일이 류큐에서도 벌어졌다는 사실이 두 나라 평행이론의 결정판 같아 소개한다. 헤이그 사건은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들을 보낸 것이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에다 특사인 척 위장해 일제의 감시망을 분산시킨 미국인 헐버트가 현지에서 합류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서구열강들의 냉대로 회의 석상에 앉지도 못했고, 이준은 그곳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자기나라 명운을 걸머진 조선과 류큐 '3인의 밀사들'의 벼랑 끝 운명

우리 특사들의 이런 행적은 똑같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처지에 놓였던 류큐 왕국의 사신들을 떠올리게 한다. 원래 류큐는 3개 나라로 나뉘었다가 1429년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 이후 여러차례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1854년 미국에 이어 프랑스, 네덜란드와도 수호조약을 맺었다. 조선보다 먼저 문을 열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1872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류큐번이 되었고 류큐 왕은 졸지에 일개 영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류큐 왕국의 성도 슈리성과 왕좌. 오른쪽은  마지막 왕 상태(재위 1848~1879)
류큐 왕국의 성도 슈리성과 왕좌. 오른쪽은  마지막 왕 상태(재위 1848~1879)

그러자 류큐의 상태(尚泰, 쇼타이) 왕은 일본 몰래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로 했다. 밀명을 받은 채대정, 임세공, 향덕굉 세 명의 사신은 긴 항해 끝에 1877년 푸젠성에 도착해 "일본의 횡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헤이그 사건이 일어나기 꼭 30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들은 이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일본군이 슈리성에 쳐들어 왔을 때 몇 명이나 맞서 싸우다가 죽었나"라며 자신들은 피를 흘리지도 않고 청나라에 피를 흘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례하다는 핀잔을 줬다고 한다. 그러다가 1879년 500여 명의 일본 군경에 의해 류큐왕국이 강졔로 해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밀사들은 곧장 텐진으로 달려가서 당시 실세였던 북양대신 리홍장과 담판을 지으려 했지만 면담 조차 거부당했다.

공교롭게도 류큐 밀사들이 청나라에서 구국 활동을 펼치는 와중에 또 다른 조공국 베트남에서도 청에 출병을 요청했다. 프랑스가 침략해 오자 베트남 사덕제는 "지원군을 보내달라"며 애걸했고, 리홍장은 먼저 무기를 지원한 데 이어 2년 뒤에는 3만 5000명의 병력까지 보냈다. 결국 힘없는 왕국 류큐는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고,  1880년 11월 밀사 중 한 명인 임세공(林世功, 1842~1880)이 끝내 자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청나라에 국비 유학생으로 갔다가 귀국 후 왕의 장남인 상전의 스승으로 발탁된 인재였다.

임세공의 소식을 듣고 그의 충혼에 감동한 청국의 서태후는 백은 200냥을 가족에게 보냈고 장례도 후하게 치러주었다. 그의 유해는 베이징 퉁저우구 이단안 마을에 묻혔다. 한데 1930년대 초 그의 묘가 파헤쳐지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의 군사평론가 타우무건이 쓴 글에는 "일제의 만주 침략에 격분한 주민들이 일본인 무덤으로 오해한 때문이었다"라고 적혀있다. 어쨌거나 '망국의 밀사' 임세공은 두 번이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셈이었다.

밀사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류큐와 조선 모두 망국의 운명을 비켜가지 못했다. 뒤늦게 밀사 사건을 알게된 일제는 류큐 번왕을 폐위시켜 도쿄로 끌고갔고, 오키나와를 아예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일제는 조선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묘하게도 밀사 사건이 일어난 지 3년 만에 두 나라가 똑같이 일본에 병합됐던 것이다. 하물며 밀사들이 헤이그 회의장과 리홍장 관저에 발도 들이지 못한 일이나 어느 나라도 이들의 호소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막힌 역사가 30년 터울로 되풀이 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향덕굉과 그가 청국에서 활동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 가운데 앉은 이가 자결한 임세공
 향덕굉과 그가 청국에서 활동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 가운데 앉은 이가 자결한 임세공

여기에다 두 나라 밀사들이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을 이어간 점도 닮았다. 하기야 돌아갈 나라도 없어진데다 귀향한들 일제가 이들을 가만둘 리 없었을 게다. 임세공의 자결 후 남겨진 두 밀사는 "귀향을 거부한다"면서 청나라에 눌러 앉았다. 류큐신보사가 펴낸 《오키나와 컴팩트사전》에는, 채대정(蔡大鼎, 1823~ ?)은 군대 파병을 계속 요구하다가 자신들의 활동을 기록한 《북상잡기(北上雑記)》라는 잡문집을 남기고 객사했고, 향덕굉(向德宏, 1843~1891)은 류큐 무역관이 있던 푸저우를 근거지로 청나라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사망한 것으로 나와있다.

헤이그 사건 후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이상설 또한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고된 항쟁을 이어갔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을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헤이그에서 각국 대표와 언론을 상대로 독립을 호소했던 이위종 역시 러시아에서 무장 항쟁을 펼치다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순국한 이준 열사의 유해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묻혔다가 1963년에야 국내로 봉환되었다.

사진 왼쪽부터 이준(1859~1907), 이상설 (1870~1917), 이위종(1884~ ?)과 서울 수유리에 있    는 이준열사 묘. 오른쪽은 중국 TV의 류큐 밀사 다큐멘터리
사진 왼쪽부터 이준(1859~1907), 이상설 (1870~1917), 이위종(1884~ ?)과 서울 수유리에 있는 이준열사 묘. 오른쪽은 중국 TV의 류큐 밀사 다큐멘터리

그나마 우리는 나라를 되찾아 이들의 애국 정신을 기리고 있지만, 현재에도 일본 땅이 되어 버린 류큐의 밀사들은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다. 흥미로운 일은 수년 전부터 임세공과 밀사 이름이 중국 매스컴에 '슬그머니' 등장해 온 사실이다. 2013년 5월 인민일보는 "일본의 류큐 영유권은 역사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라는 기사를 냈다. 같은 해 베이징TV는 《사라진 왕국 - 일본이 류큐를 삼킨 전말》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환구시보가 일본의 류큐 점령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지를 밝힌데 이어 몇몇 언론에서는 "중국의 조공국 류큐는 우리 땅이다"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고 있다.

 

지워진 남의 나라 역사에서 '류큐 밀사' 끄집어낸 중국의 속내는

왜 중국이 한 세기 반 가까이 지난 해묵은 역사에서 류큐 얘기를 끄집어낸 걸까? 기사가 나온 시기는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영토 분쟁을 벌이던 시점과 대략 일치한다. 센카쿠 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뜬금없이' 류큐를 끌어들인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중국 언론이 정부의 통제에 놓여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조공을 바치던 오키나와가 자기네 땅이란 주장은 정부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게다.

사실 역사문제에 관한 한 일본도 문제지만 동북공정을 내세우는 중국은 한반도에 더욱 잠재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우리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가 하면 만주 땅에서 펼친 독립 항쟁도 자기네 항일 역사로 덧칠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반도 통일 이후에 다가올 영토 분쟁에 대비해 미리 대못을 박아 놓으려는 심사일런지도 모르겠다.

6월15일은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날이다. 112년 전 이곳에 파견된 대한제국 특사들의 삶은 힘없는 나라의 외교란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이 굳게 닫힌 헤이그 회의장 앞에서 이위종이 외친 말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고 왜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는가" 오늘에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 가슴 답답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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