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형 일자리’ 주연은  LG인가, 청와대인가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6.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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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화학 참여 놓고 정·재계에서 뒷말 나오는 이유

LG화학이 경북 구미시에 5000억~6000억원을 들여 전기자동차 배터리의 핵심소재인 양극재 공장을 짓기로 했다. ‘일자리 늘리기’를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은 문재인 정부엔 분명 반가운 뉴스다. 정부는 관련 생산시설이 들어서면 1000명 이상의 고용효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경기 위축에 기본소득 인상으로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걱정해 온 정부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구미형 일자리는 여기저기서 뒷말이 나오고 있다. 주연과 조연이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일까.

구미형 일자리는 연초부터 기획됐다. 국회 환경노동위 소속 장석춘 자유한국당 의원(구미 을)에 따르면 LG와 경북도는 올 3월부터 구미5산단 투자를 놓고 접촉을 벌였다. LG 쪽에서는 권영수 부회장이 나왔고, 경북도에서는 이철우 지사가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 만남은 구미시를 지역구로 둔 장석춘 의원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장 의원은 1999년부터 2008년까지 LG전자 노조위원장을 역임하고 2008~11년 한국노총 위원장을 지냈다.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했다.

당초 구미시와 경북도는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클러스터는 10년간 120조원이 투입되는 개발 프로젝트로 구미시를 비롯해 경기 이천, 충북 청주, 충남 천안, 경기 용인 등이 유치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하지만 올 2월 용인으로 결정 나자 구미시는 강하게 반발했다. 

배터리 완성품을 생산하고 있는 LG화학 충북 오창공장 ⓒ LG화학 제공
배터리 완성품을 생산하고 있는 LG화학 충북 오창공장 ⓒ LG화학 제공

TK 유일한 與 단체장 지역인 구미에 ‘선물?’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에 기대를 걸었던 구미시와 경북도가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LG화학이다. 3월에 만난 자리에서 경북도는 LG에 투자를 요청했고, LG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입장만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북도는 이 자리에서 SK하이닉스에 제시했던 ‘경북형 일자리 투자유치 특별모델’이라는 제안서를 내밀었다. 물론 이때까지 LG의 국내 투자는 그룹 수뇌부 몇 명만 논의할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구미형 일자리가 이슈로 다시 부각된 것은 5월 하순부터다. 한 언론에 “구미형 일자리를 위해 LG화학이 구미시와 함께 전기차 배터리 생산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가면서부터다. 관련 업계에서는 보도의 진원지를 청와대로 보고 있다. 대관업무를 담당하는 한 대기업 임원은 “LG는 청와대 핵심 관계자로부터 구미형 일자리를 제안받고 ‘고민해 보겠다’고만 답한 상태였는데, 이후 관련 보도가 나가면서 그룹 수뇌부가 당황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LG그룹 한 고위 임원도 “언론보도를 보고 관련 사실을 알았을 정도로 전혀 예상치 못한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구미시는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TK(대구·경북) 지역 내 유일하게 여권이 승리를 거둔 곳이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소속 장세용 시장이 단체장이다. 20대 총선에서 농림단체 몫으로 비례대표가 된 김현권 민주당 의원은 구미 을에 지역구를 두고 내년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올 초 SK하이닉스가 경기 용인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기로 결정하면서 반여(反與) 정서가 커지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LG가 생산시설을 구미시에 짓겠다고 결정한 것은 정치적으로 해석할 때 나쁘지 않은 구도다.

현재 거론되는 부지는 구미국가산업5단지다. 한국수자원공사가 개발한 이 부지는 전체 면적의 22%만 분양됐다. 토지 분양가는 3.3㎡당 86만원이다. 구미형 일자리가 성공하기 위해선 해당 토지를 LG 쪽에 싸게 공급하는 게 관건이다. 자칫 이미 토지를 매입한 사업자들로부터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현재로선 구미시·경북도 등 공공이 토지를 분양받은 뒤 LG에€장기 임대하는 방안이 유력시되고 있다. 이럴 경우 생산시설을 지어야 하는 LG로선 부담이 한결 줄어든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금액의 땅값을 이들 공공기관이 떠안을 수 있을지는 살펴봐야 한다. 

양극재는 음극재·전해질·분리막과 함께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소재다. 현재 LG화학의 국내 양극재 생산시설은 충북 청주와 전북 익산에 있다. 여기서 만들어진 양극재는 충북 오창의 배터리 완성품 공장으로 납품되고 있다.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가운데)과 정태호 일자리수석이 3월5일 고(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뒤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가운데)과 정태호 일자리수석이 3월5일 고(故)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뒤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靑 강한 ‘일자리’ 의지, 기업엔 압박으로 

전기자동차 배터리 제조업은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분야다. 주요 고객은 친환경 차의 본고장으로 불리는 유럽의 폭스바겐·BMW 등 대형 메이커다. 이렇다 보니 관련 부품 기업들은 유럽에 생산시설을 짓는 게 일반적이다. LG화학은 이미 동유럽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배터리셀과 팩을 만드는 배터리 완성품 공장을 갖추고 있다. 미국 홀랜드와 중국 난징에도 생산공장이 있다. 생산량 면에서 충북 오창공장이 많다 보니 관련 업계에선 유럽 공장 증설이 거론돼 왔다.

이번에 구미에 들어설 양극재와 관련해서도 원래는 해외 생산 가능성을 높게 점쳐왔다. 지난해 LG화학은 코발트 제조업체인 중국 화유코발트와 양극재를 생산하기 위한 합작법인을 설립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배터리의 경우 공급할 완성차 공장과 가까운 곳에 들어서는 게 여러 혜택을 받는 측면에서 유리하며, 양극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시장 수요를 감안해 공장을 신설하려 했다면, 국내보다는 해외 투자가 나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LG는 왜 해외 생산을 포기하고 구미에 생산시설을 짓기로 결정했을까. 물론 LG 내부에서는 구미라는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구미는 LG에게는 고향과 같은 곳이다.€하지만 일자리 확보가 목표인 정부가 국내 투자를 요청했을 경우 현실적으로 LG로선 이를 외면하기 힘들다. 한 바른미래당 의원실 보좌관은 “내부 검토 중인 사항이 언론을 통해 먼저 나오다 보니 LG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이고, 가장 부담이 적은 부품소재 분야 투자를 결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LG는 국내 투자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지난 5월 “제2, 제3의 광주형 일자리를 활성화해야 하며 6월 내로 한두 곳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하자마자 LG가 투자를 결정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해석을 낳게 만든다. 일자리 창출에 대한 청와대의 강한 의지가 기업 입장에선 그만큼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구미형 일자리의 성공은 실효성에 달려 있다. 정부는 구미형 일자리를 통해 1000~2000여 개의 일자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양극재 생산의 상당 부분을 기계가 맡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일자리는 500여 개 미만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어지간한 대형 쇼핑몰 수준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임금 상승을 제한하는 ‘광주형 일자리’와 형식이 비슷할 경우 민주노총 산하에 있는 LG화학 노조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구미형 일자리에 대해 LG화학 측은 “구미에 생산시설을 짓기로 관계기관과 협의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으로 확인해 줄 게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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