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사람을 아는 이가 살려낸 장일순의 생애
  •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4 11:00
  • 호수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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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장 지낸 모범작가 김삼웅의 《장일순 평전》

늦봄인 1994년 5월22일 한 사람이 원주 봉산동에서 영면했다. 무위당 장일순. 시인 도종환은 ‘그는 흙 같은 분이셨다/풀도 꽃도 나무도 다 모여 살게 하는/그는 대지의 생을 사신 분이셨다’고 적었다. 언론인 리영희 선생은 ‘싸우는 전선에서 비틀거리는 자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싸우는 방법을 모색하는 이에게는 지혜를 주셨다’고 추모사를 썼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할 일이 많은 해였지만, 67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조용히 세상을 떠난 장일순의 삶이 사람의 기록자인 김삼웅 작가를 통해 다시 살아났다. 대한매일신보(현재 서울신문)의 주필을 거쳐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활동하는 김삼웅 작가를 운현궁 맞은편에 자리한 천도교회관에서 만나 《장일순 평전》을 통해 무위당을 돌아본 시간의 의미를 들어봤다.

《장일순 평전》 김삼웅 지음│두레 펴냄 │416쪽│1만9000원 ⓒ 조창완 제공
《장일순 평전》 김삼웅 지음│두레 펴냄 │416쪽│1만9000원 ⓒ 조창완 제공

쉼 없이 평전 통해 역사 속 인물 되살려

“고문의 후유증인지 이제 글을 쓰기가 어려운데, 뒤늦게나마 장일순 선생의 삶을 살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인연이 엇갈려 직접 대면하지 못했는데, 같은 민주화의 시간을 살아간 동지로서 그를 다시 볼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던 김삼웅 작가는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아 보였다. 작가는 1943년생으로 20대 초반에 ‘사상계’ 신인논문상에 입상해 펜의 세계에 들어왔다. 1975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거쳐, 신민당보 ‘민주전선’의 편집장을 지낸 후 1980년 신군부 세력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 보니 작가의 삶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이한 길이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독립기념관장을 지내면서 그가 꿈꾸던 역사와 사람을 연결하는 일을 했다. 당연히 그가 되살려야 하는 사람은 지천이었다.

그래서 일흔 후반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쉼 없이 평전을 통해 역사 속 인물들을 되살리고 있다. 독립운동가였던 홍범도, 이회영, 신채호, 김창숙, 김구 등 10여 명이 있고,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과 김구의 평론을 썼다. 그 밖에도 조봉암, 장준하, 신영복 등 우리 근대사의 중요한 기틀이 된 사람들의 기록도 있다. 

“영면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장일순은 세상과 이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정신은 ‘무위당 사람들’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지속되고 있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생활협동조합인 ‘한살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분의 삶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평전이 없었는데, 내가 그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장일순은 일제 강점이 중반기 정도였던 시기에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시 원주에서 세 번째로 잘살 정도로 부유했다. 부자였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풍이 있었고, 장일순 역시 배재학교를 거쳐 서울대에 입학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후 장일순은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활동을 벌이다가 교육법인인 대성학원을 세운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정치에도 눈을 돌리지만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이나 그가 녹녹하게 지내기는 쉽지 않았다. 원주의 지도자였던 만큼 그에게도 수없는 회유가 들어왔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학생들이 한·일 회담 반대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줬고, 대신에 매는 스스로 맞았다.

그러던 1965년 3월 지학순 신부가 원주교구 초대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둘은 남은 생을 동지로 지냈다. 지학순은 실천적 천주교 정신을 선물했고, 장일순은 개혁사상과 민중과 더 가까운 삶을 보여줬고, 1년의 사이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군부에 학원재단을 잃는 등 고통이 있었지만 장일순은 꾸르실료(천주교의 실천적 평신도 단기 교육훈련) 활동 등을 통해 더 발전된 협동조합 운동을 만들 수 있었다. 1966년 11월 원동성당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은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한 신협의 뿌리가 됐다.

“장일순은 단순히 힘든 사람을 돕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1972년 8월 대홍수 때 지학순 주교와 노력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구호자금을 받은 후 진행한 과정만 봐도 그렇습니다. 책에 잘 소개하지만 식량지원에 멈추지 않고 농토를 복구하는 한편 농민의 소득원을 개발하는 방식을 만든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런 마인드가 있었기에 훗날 ‘한살림’ 등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장일순, 시대의 아픔을 넘기지 않았던 인물”

그는 어떤 자리나 이권도 탐하지 않았다. 대신에 조합원은 사람 중심, 신뢰, 민주적 운영, 기금 운영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실천할 수 있게 틀을 짰다.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이 있는 원주는 이후 한국 민주화의 거점이 됐다. 리영희, 백낙청, 김민기, 홍세화, 임진택, 김지하 등도 원주를 찾아서 그와 정신을 나누었다. 당연히 박정희 정권에는 가장 깊은 가시였고, 1974년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이들을 탄압했다.

“장일순은 시대의 아픔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시형의 생명사상이 담긴 동학을 바탕으로 하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고, 천지만물을 섬기라는 삶을 창조해 갔습니다. 당연히 80년 광주항쟁이나 미문화원 사건 등으로 고초를 겪은 이들이 원주라는 공간을 통해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장일순은 조용히 자리를 지킨 인물입니다.”

광주의 피로 정권을 얻은 전두환 정권이 절정으로 치닫던 1983년 여름에 만들어진 ‘민족통일국민연합’의 결성에도 장일순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도농 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해 갈수록 커지는 생활협동조합의 기초를 다졌다.

“장일순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생태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 전통적 농업의 원리 속에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해답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1985년 6월 창립한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이 그 뿌리입니다. 이 조직은 현재 전국에 130여 개 조합, 65만여 조합원을 가진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책을 쓰면서 이런 그의 삶을 보면서 진정한 시민사회의 가치를 많이 느꼈습니다. 하지만 하늘도 필요했는지 너무 이른 시간에 그를 데려갔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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