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매운동’ 대상인 日 빅3 맥주, 모두 전범기업 제품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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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34화 맥주에 취한 식민지

여름은 맥주의 계절이다. 무더위나 바캉스 시즌에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면 맥주 업체들의 치열한 마케팅 전쟁이 벌어지곤 하는데, 요 며칠 사이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가 보복 조치를 취하면서 국내에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거세진 탓이다. 묘하게도 일본의 '빅3 맥주' 모두 전범기업 제품이란 사실이 이 운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다.

우리가 아무 의미 없이 마시지만, 맥주는 사실 제국주의 침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일본 삿포로 맥주를 상징하는 '별'모양을 보더라도 그렇다. 1867년 메이지 정부의 개척사들이 본토에서 홋카이도로 건너갈 때 배의 마스트에 걸린 깃발에 별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북극성을 뜻하는 이 별은 "길을 잃지 않고 정진하라"는 개척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삿포로 맥주는 이런 개척 정신을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다. 한데 개척을 달리 해석하면 정복과 연결된다. 홋카이도에 상륙한 일제 침략자들은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잔인하게 짓밟고 강제 이주시키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가장 사랑받는 '맥주',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 '침략과 약탈'의 흑역사

주목되는 점은 홋카이도 정벌에 앞장선 구로다 기요타카(1840~1900)가 바로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강제한 인물이란 사실이다. 아이누족을 토벌하고 첫 식민지 경영에 성공한 그는 무력으로 조선의 문을 여는 적임자로 선발됐다. 임무를 마치고 홋카이도로 돌아온 구로다는 그해 9월 삿포로에 일본 최초로 '개척사 맥주양조소'를 짓게 되었다. 이곳에서 맥주 원료인 야생 홉을 발견한 안티셀이란 외국인이 "맥주 산업을 일으켜 지역 경제를 살리자"고 조언하자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초 구로다가 만든 '관영' 양조장은 1887년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에 의해 주식회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시부사와는 이 양조장을 사들여 오늘날의 삿포로 맥주로 발전시켰고, 기린 맥주 역시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또한 일제의 이권 침탈을 위해 대한제국 화폐를 발행하고, 스스로 지폐 속 인물로 등장해 우리에게 치욕을 안기기도 했다. 시부사와는 얼마 전 1만 엔 짜리 일본 화폐의 인물로도 선정되어 두 나라 지폐에 얼굴을 올리는 '기막힌'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이 일본 맥주의 역사에는 한반도 외교ᆞ경제 침탈에 앞장선 인물들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삿포로 맥주의 심볼인 붉은 별과 양조소 개장 모습. 오론쪽은 2대 총리대신을 지낸 구로다. 시부사와 초상이 새겨진 대한제국 은행권
삿포로 맥주의 심볼인 붉은 별과 양조소 개장 모습. 오론쪽은 2대 총리대신을 지낸 구로다. 아래는 시부사와 초상이 새겨진 대한제국 은행권

맥주의 침략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삿포로 맥주와 아사히 맥주는 '대일본맥주'로 통합되었고 일제의 침략에 발맞춰 대륙에도 진출했다. 1914년 일본군이 중국 산둥반도의 칭다오를 점령한 뒤 맥주 공장을 인수했다. 원래 '칭따오 맥주'는 독일 회사가 만들었다. 1897년 독일 함대가 이곳을 무력으로 차지하자 ‘게르만 맥주회사’를 세우고 공장을 짓게 되었다. 2013년에 발간된 《근대일본의 맥주 양조사와 유산》에 따르면, '대일본맥주'는 독일 공장의 설비를 늘리고 여기서 생산된 맥주에 ‘삿포로’와 ‘아사히’ 라벨을 붙여 일본에 보냈다고 한다. 또 칭다오에서 얻은 독일식 제조기술을 활용해 동남아 시장에 진출했고,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도 수출했다. 일제 침략에 편승해 약탈하다시피 한 설비와 기술, 그리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했던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당시 중국내 판매를 위해 만든 광고물인데, 하나는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할 때 맥주를 마셨다는 내용이다. 다른 하나에는 중국 전통 의상인 '치파오'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등장시켰다. 이는 "칭따오 맥주를 마시면 남자는 영웅호걸이 되고, 여자는 미인이 된다"란 의미로서 술 광고의 '고전'으로 전해져 왔다. 어찌됐든 ‘칭따오 맥주’는 1922년 산둥반도가 중국에 반환된 뒤에도 여전히 일본 기업으로 남았고, 이는 일본 패망 때까지 지속됐다.

독일의 칭다오 맥주 공장과 일본이 만든 맥주 광고
독일의 칭다오 맥주 공장과 일본이 만든 맥주 광고

왜 열강들은 침략하자마자 맥주 공장을 지었을까? 아무래도 식민지의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어 쉽게 돈벌이가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식민통치를 위한 세금 때문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예컨대 베트남을 통치한 프랑스는 술을 독점하고 마을마다 강제로 할당량을 정해  놓았다. 당연히 술값이 몇 배로 뛰어올랐고 이를 고스란히 세금으로 빼앗았다. 여기에다 식민지인들을 술에 취하게 만들어 저항 의식을 무디게 하려는 목적도 빼놓을 순 없을 게다. 맥주는 이처럼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경제 침탈과 그 역사를 같이 했던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 지배에 놓인 베트남에서는 1875년 프랑스 사업가 빅톨 라루에가 '사이공 맥주' 양조장을 열었고, 미얀마에서도 영국 식민지 시절에 맥주 회사가 세워졌다. 필리핀 역시 식민본국인 스페인의 사업가가 1890년 마닐라에 '산 미구엘' 맥주 공장을 지었다. 그런데 이 맥주는 현재 "동서양 맥주의 특성을 잘 살려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스페인을 비롯해 세계 50여 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독일이 처음 만든 칭따오 맥주도 특유의 톡 쏘는 맛을 더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이렇듯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유입된 '슬픈' 맥주는 아시아 각국에서 '효자 상품'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우리의 맥주 역사는 의외로 일천하다. 1933년에 가서야 '대일본맥주'가 서울 영등포에 조선맥주와 기린맥주 공장을 세웠다. 만주 침략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일제가 이 일대에 군수 생산시설을 많이 지었는데 맥주 공장도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자연 아시아 다른 나라들보다 맥주 제조와 기술 도입이 반 세기나 뒤처진 셈이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선 "국산 맥주는 밋밋하고 맛이 없다"면서 이는 일본이 우리에게 선진 제조기술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갯 소리도 나온다. 서구의 기술을 이어받은 '식민지 맥주'들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다 보니 이런 얘기가 나오는게 아닌가 싶다.

국산 맥주가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해서인지 2010년대 초반부터 해외 맥주업체들이 국내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무려 600여 종의 수입 맥주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일본 맥주가 1, 2위를 다투고 있다. 한반도 침략의 선봉장들이 만든 일본 맥주는 지금도 이 땅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는 셈이다. 더욱 기막힌 일은 부동의 1위인 아사히 맥주를 비롯해, 삿포로와 기린 맥주 등 빅3 모두 강제징용에 연루된 전범기업들의 계열사란 사실이다. 이들을 위시해 299개 전범기업들은 자동차부터 화장품, 농약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천문학적인 배당금과 로열티를 가져가는 실정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국내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여론 확산으로 편의점과 대형마트에서 지난주 일본 맥주의 판매량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10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편의점에 진열된 일본 수입 맥주 모습 ⓒ연합뉴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국내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여론 확산으로 편의점과 대형마트에서 지난주 일본 맥주의 판매량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10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편의점에 진열된 일본 수입 맥주 모습 ⓒ연합뉴스

우리 입맛을 사로잡은 일본 '전범기업 맥주'

사정이 이런데도 며칠 전 일본 정부는 우리 반도체에 쓰이는 소재 공급을 사실상 중단시켰다. 얼핏 이번 조치를 살펴보면 1930년 인도에서 일어난 '소금 항쟁'을 떠올리게 된다. 영국은 소금 생산을 독점하고 엄청난 세금을 매겼다. 소금은 대체재도 없었다. 당시 마하트마 간디는 이를 '생존권 침탈'로 규정하여 민중들의 단합된 힘을 이끌어 냈고, 결국 영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혔다. 소금 항쟁과 비교해 볼 때, 뾰쪽한 대체재가 없기는 반도체 소재도 마찬가지다. 또 반도체 산업은 우리 경제의 젖줄로서 소금 만큼이나 중요하다. 더구나 영국과 일본이 서로 독점한 물건을 무기로 생존을 위협하는 행태 또한 꼭 닮았다. 이번 반도체 사태가 경제 보복을 넘어 남의 것을 해치고 빼앗는 '침탈'로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장 먹고 사는데 급급해 분란만 일으키다가 뼈아픈 운명을 맞게 된 일들을 우리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분명히 일본의 침탈은 반도체 소재에서 끝나지 않을 게다. 문제는 단합된 힘이다. 이번에야말로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비자도 조국이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일본에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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