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체를 찾지 말라”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3.04.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바그다드의 ‘마지막 평화 지킴이’ 한상진·유은하·배상현 씨

"

하나님, 은하 자매를 지키고 보호해 주소서.” 지난 3월20일 저녁, 서울 이문동 동안교회에서는 특별기도회가 열렸다. 3월14일 이라크에 입국해 아직 바그다드에 남아 있는 이 교회 신도 유은하씨(29)를 위한 기도회였다. 유씨의 사진을 앞에 두고 기도를 나누던 청년회 소속 신도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시울을 붉혔다.

3월22일 현재 이라크에 남은 한국인은 유씨를 비롯해 한상진·배상현·조성수 씨 등 4명이다. 이 중 종군기자 조성수씨를 제외한 3명은 반전평화운동을 위해 자원한 민간인이다. 바그다드에는 한국인이 수십명 있었으나 가족과 정부 당국의 끈질긴 설득으로 모두 철수하고 이들만 남았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화염에 휩싸인 바그다드에 남은 ‘마지막 평화 지킴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2월12일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이들을 ‘횃불로 날아드는 부나비’라며 조롱했다. 영웅주의와 모험심에 빠져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시선에 대해 유씨의 친구 이경희씨(30)는 터무니 없다며 “차라리 평소에 영웅·투사 같은 아이였다면 마음이 덜 아플 텐데”라고 고개를 저었다. 유씨가 이라크로 떠나기 며칠 전 같이 식사를 한 황석주씨(28)는 “꼭 바그다드에 남아야 하느냐. 요르단에서 난민을 지원하는 것도 좋은 일 아니냐”라고 유씨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때 유씨의 답은 이랬다. “이라크 사람들은 후세인에게도 버림받았고, 미국에도 버림받았잖아. 지금 그곳 외국인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는데, 누군가는 그곳에 남아서 그들의 빈 마음을 채워줘야 하지 않겠어?”

유씨가 바그다드에 남게 된 데는 종교의 힘이 컸다. 유씨는 이라크 입국 직전 요르단에서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하나 올렸다. ‘내가 간다고 해서 전쟁이 막아질까. 아무 소용 없는 짓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 로마서 12장 말씀이 걸렸습니다.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만으로도 주님 앞에서는 의미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윤동주의 시를 좋아한 국문학도였던 그녀는, 중동 지역 선교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유씨는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시사저널>에 실린 인간 방패 관련 기사(695호)를 본 것이 반전평화운동을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고 썼다.

유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이야기 하나. 유씨의 친구 남상곤씨(29)는 9·11 사건이 터진 직후 유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 아프다. 미국대사관에 같이 가 기도하자”라고 권했다. 그녀는 대사관을 에워싼 전경들 사이로 꽃을 놓고 눈물을 흘렸다.유씨에게는 미국이냐, 이라크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불교 신자인 유씨의 어머니는 밤 늦게까지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 아버지 유옥성씨(56)는 “은하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이 다시 생겨도 나는 은하를 막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라크에 남은 또 다른 한국인 배상현씨(28)의 주변 사람들은 가장 걱정이 많았다. ‘인간 방패’라는 용어를 거부하며 바그다드 민간인 거주 지역에서 활동해온 다른 두 사람과 달리 배씨는 ‘인간 방패’ 단체에 속해 바그다드 북부 변전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3월20일 첫 공습이 있은 후 짐을 싸고 변전소를 나왔다.

그는 창원의 한 기계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노조 조직부장을 맡으며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으나, 좌파운동에 대한 신념보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을 좋아하는 천성이 더 강했다. 주변의 여러 이름 없는 작은 단체에 가입해 봉사 활동을 하는 데 유달리 열심이었다. 성당 노동청년회에 있으면서 자매 결연을 한 노인회와 고아원을 방문해 잡일을 도와주곤 했다. ‘쉼터’라는 여성단체나 ‘우리 농산애용 운동’을 벌이는 농민 단체 등 마산 지역 사회운동에 자주 참여했다. 최근에는 공장을 그만두고 작은 가게를 꾸리고 있었다. 배씨의 이라크행을 후원한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영만 대표는 “처음 자원자를 받았을 때 평소 시민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은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다. 대신 눈에 띄지 않았던 평회원인 그가 자원해 놀랐다”라고 말했다. 배씨가 이라크로 떠나기 이틀 전, 동료 김한수씨는 배씨에게 꼭 살아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배씨는 “말 그대로 인간 방패로 가는데 살아 온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반문했다.

배씨의 어머니 노릇을 하는 (배씨는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다) 고모 배해련씨는 “그 애가 외국에 봉사 활동 하러 간다기에 허락했다. 상현이에게 봉사 활동은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라크라는 사실을 알고 사시나무 떨듯이 전율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공습이 시작된 지 이틀이 지났지만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하루 종일 텔레비전 뉴스를 보거나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며 애를 태우고 있다.

이라크에 있는 한국인들을 이끌고 있는 리더는 한상진씨(38)다. 그는 3월20일 지인에게 e메일로 유서를 한 장 보냈다. ‘내가 죽으면 시체를 찾지 말라. 그리고 나를 추모하는 사업을 갖지 말라. 나와 관련해서 어떤 것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한씨는 이라크로 가겠다고 처음으로 자원한 사람이었다.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 그는 어렸을 때 지뢰 때문에 불구가 된 마을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이 기억은 그가 훗날 대인지뢰금지 운동단체인 ‘함께가는 사람들’을 꾸리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뢰 피해 사실을 숨기려는 민통선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마을 곁으로 주거지를 옮겨 같이 살기도 했다. 그는 군대 경험이 자신을 평화운동으로 내몰았다고 말하곤 했다. 사격 훈련 때 사람 모양의 과녁을 보고 도저히 총을 쏠 수가 없어 무척 괴로워했다고 한다. 영어도 곧잘 했던 그는 외국 평화단체와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도 맡았다. 국제 행사를 조직하고 외국인들을 안내하기도 했다. 그는 방한한 미국의 비폭력 평화운동가 데이비드 하소에게서 많은 감명을 받고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비조직적이고 개인 행동을 잘했다는 평도 있다. 이제 나이로 보아 조직을 거느릴 때가 되지 않았냐는 주변의 권유에 대해서는 거대 조직의 폐혜를 논하며 거절했다. 1천5백원짜리 지하철 직원용 식당을 애용했으며, 뭔가를 소유하거나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세 ‘민간인’들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미혼이며, 신앙심이 깊다. 그리고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내면으로는 누구보다 비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나비가 아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